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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4대 악녀(惡女)

월광화 2022. 11. 19. 17:34

이화원(서태후 여름별장입구)

 

 

중국의 4대 악녀(惡女)(1)

 

한고조 유방(劉邦)

 

<1> 달기(妲己) 

◇ 상(商/殷)왕조 말기/ BC 11세기 경/ 주왕(紂王)의 비(妃)

달기(妲己)는 중국 상(商/殷)나라 유소(有蘇) 출신의 여인으로,

훗날 중국 역사상 폭군으로 악명 높은 주왕(紂王)의 애첩이 되는데

중국 역사상 절색(絶色)의 여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미인이며,

아울러 음탕한 여인의 대명사로도 손꼽히는 여인이다.

 

상(商)나라 말기의 주왕은 달기를 몹시 총애하여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달기는 정실 황후인

강황후의 질투를 받았고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자객 강환이 주왕을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달기는 이를 강황후에게 덮어씌우고

자백하라고 눈을 파내는 등

악행을 저질렀고 결국 강황후는 사망하게 된다.

 

은주달기조(殷紂妲己條)에 보면 달기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이라는 형벌을 만들었는데

기름을 바른 구리(銅) 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놓고

죄수가 벌겋게 달구어진 기둥위로 맨발로 건너게 하여

미끄러져 떨어져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보며

손뼉을 치며 깔깔대고 웃었다고 한다.

 

또 돈분(躉盆)이란 형을 만들었는데

구덩이에 죄수들과 독사와 전갈을 함께 집어넣고

그들이 물려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겼다고도 한다.

 

주왕은 달기에게 완전 빠져

달기가 하자는 대로 하여 악행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를테면 멀쩡한 신하(진상위)의 눈알빼기,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보기,

한 여름에 뼈가 시려 강을 못 건넌다는 노인의 다리뼈를 잘라

골수보기 등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또, 술을 채운 연못 주변에 고기를 걸어둔 숲(酒池肉林)을 만들어서

술에 취한 나체의 남녀가 서로 뒤쫓아 혼음(混淫)하는 것을 보고 즐기는 등

날마다 음탕한 밤을 보냈다. 

 

충신 구후(九候)는 달기의 악행을 보다 못해

천하절색인 딸을 주왕에게 바쳤는데,

달기는 그 딸을 모함으로 죽이고 아버지인 충신 구후 또한 참살한다.

 

또, 주왕의 숙부이기도 한 재상 비간(比干)이 

“선왕(先王)의 전법(典法)을 따르지 않고

아녀자의 말만 따르시니

재앙이 가까울 날이 머지않았습니다.”라고 간언하자,

달기는 주왕에게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七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고 하면서

주왕을 부추겨 비간을 죽여 심장을 도려내서 드려다 보았다고도 한다.

 

충신 비간의 죽음으로 백성들은

상나라(商/殷)에 손톱만큼의 애정도 없어졌고,

주(周)를 중심으로 팔백 제후가 일어나 중국의 두 번째 나라였던

상(商/殷)나라는 31대 주왕(紂王)을 끝으로 왕조의 문을 닫고 마는데

결국 달기(妲己)라는 여인으로 인해 망했다고 할 것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군사를 몰아 쳐들어와,

패색이 짙어지자

주왕은 보물이 저장되어 있는 녹대(鹿台)로 올라가 불을 지르고

불에 뛰어내려 자결하는데 주왕(紂王)이 죽은 뒤,

달기도 무왕(武王)에 의해 참수된다.

 

무왕(武王)은 타버린 주왕의 시체를 가져다 관례대로 목을 치고

주왕의 몸에 화살을 세대 쏘았다고 한다.

첫 화살은 하늘의 명을 거역한 죄로 금 화살,

두 번째는 나라를 망하게 한 죄로 은 화살,

세 번째는 백성을 힘들게 한 죄로 동화살 이렇게 세대를 타버린 주왕의 몸에 꽂았다.

 

주왕의 애첩 달기도 잡혀 끌려 나왔는데

달기 또한 목이 잘려 역시 화살 세대를 맞고,

주왕의 목과 함께 백기에 걸렸다고 한다.

 

달기의 처형 때 달기의 미모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묶여 끌려 나오는 그 모습, 눈물까지 흘리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목을 쳐야 할 망나니들이 넋이 빠졌다고 한다.

망나니는 달기의 촉촉한 눈망울을 보면

칼을 든 팔을 부들부들 떨며 끝내 칼을 못 올렸다고 하고

다른 망나니로 교체해도 마찬가지였다.

 

90세 할아버지 망나니를 내 세웠으나 그 마저 차마 못 쳐서,

할 수 없이 달기 머리 위에 비단을 덮어 못 보게 한 후 간신히 목을 쳤다고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주나라 군대가 조정(朝庭)에 진입한 후에

주공(周公=주 무왕)이 달기를 취하여 그의 시녀로 삼았다고 나와 있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는 옛날이야기를 즐겨 들려 주셨는데

달기를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九尾狐/여우)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포락지형을 받고 죽은 시체를 공동묘지에 내다 묻으면

밤에 달기가 몰래 궁궐 담을 넘어 나와서는 하늘에 한번 공중제비를 돌면

여우로 둔갑하는데 무덤을 헤치고

불에 그슬린 시체를 파내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꺼내 먹는다는....

 

 

유왕과 포사(褒姒)
유왕(幽王)과 비(妃) 포사(褒姒)

 

 

<포사(褒姒)>

BC 8세기 주(周) 왕조 말기,

상(商)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 역시

유왕(幽王)의 비(妃) 포사(褒姒)라는 여인에 의해

결정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포사는 주(周)의 마지막 임금 유(幽)의 왕후였는데

포사는 궁에 들어온 후 한 번도 웃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실수로 적군이 쳐들어오지도 않는데

봉화(烽火)를 올린 일이 있었는데 제후들이 사방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포사가 깔깔 웃었다고 한다.

 

 

거짓으로 봉화를 올렸고...

 

유왕은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보고자

이따금 거짓으로 봉화를 올렸고 포사는 그때마다 깔깔 웃고....

남자들이 여자가 웃는 모습을 한 번 보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쓴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천금매소(千金買笑)’라는

사자성어가 바로 이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이 포사는 4대 악녀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거의 준하는 악녀이다.

 

*중국 고대사에서 신화시대인 삼황오제(三皇五帝)의 뒤를 이어

하(夏)-은(殷)-주(周)로 이어지는데 은(殷)나라는

사실 상(商)나라로 그 수도가 은허(殷墟)였기 때문에 ‘은나라’ 라고도 불렸다.

 

 

 

<2> 여태후(呂太后) 

 

여치(呂雉)

 

◇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비(妃)/BC 240년 전후/ 아명 여치(呂雉)

 

여태후의 아버지 여문(呂文)은 산동(山東) 출신의 유지로,

가족들을 데리고 유방(劉邦)의 고향인 패현(沛縣)으로 이사를 하여

딸(아명 呂雉)을 낳는데 이 딸이 장성하여 유방과 결혼하게 되고

훗날 유방이 한(漢)나라의 왕이 되자 태후(太后)가 된다.

 

여태후는 두 아이를 낳는데,

첫째가 후일 노원공주(盧元公主)로 불리게 될 딸이고,

둘째가 황제를 계승하게 될 유영(劉盈)이었다.

 

유방과 여치는 결혼 후 평범한 농민들의 삶을 살았는데

젊은 날 유방은 가정에 헌신적인 남자가 아니라,

바람기가 많고 주색잡기에 능한 한량(閑良)풍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진(秦)나라 말기,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항우(項羽)와

손을 잡은 유방(劉邦)은 진나라를 멸하고

다시 항우와 치열한 패권다툼을 벌이게 되는데(楚漢戰)

전쟁 초기에 항우의 병사들에게 포로가 되었던 여치는 이 기간 내내

초나라의 군영에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 온갖 굴욕과 멸시를 받아야 했다.

 

이때에 받은 심리적인 타격이

훗날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한다.

 

유방(劉邦/漢)이 항우(項羽/楚)를 물리치고 한왕(漢王)이 되자

황후가 된 여치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유방의 총애를 받고 있던 제2부인 척희(戚姬)라는 여인이었다.

 

척희는 대단한 미인이었으며

혁명과 전쟁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8년간이나

유방과 함께 전선을 누빈 혁명동지이기도 했다.

 

척희에게는 여의(如意)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태자인 여치 소생의 유영(劉盈)은 선량하지만 나약한 성품인데 반해

척희 소생의 여의(如意)는 제왕으로서 필요한 품성을 모두 타고난 왕자였다고 한다.

 

유방은 나약한 태자 영(盈)을 폐하고

여의를 대신 후계자로 세우려고 하다가

중신들의 반발로 일단 보류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 여태후(呂太后)에게 척희 모자는 목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여태후는 이미 정계를 은퇴한 장량(張良)을 찾아가

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태자의 폐위를 막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한나라(劉邦)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는

세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유방(劉邦/漢高祖)의 고향 친구인 소하(簫何)는

재상을 맡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재사(才士) 장량(張良)은 최종적인 승리의 설계자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명장(名將) 한신(韓信)이 있었다.

 

천하가 평정되자 장량(張良)은 스스로 은퇴하고,

소하(簫何)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한신(韓信)은 유방이 항우와 싸울 때

그를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해내는 등 일등공신으로

후일 한왕(韓王)의 자리를 차지하는 등 권력욕이 강했다.

 

한신은 물러날 때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항상 불평불만이 많았으나 유방은 차마 탓하지 못했다.

 

유방을 위해 껄끄러운 한신을 제거한 사람은 여황후였다.

그녀는 유방이 출타한 동안 한신에게 모반죄를 씌워

그의 일가친척, 친구들과 함께 그를 처형했다.

 

유방과 한신은 혁명 중에 서로에게 맹세하기를

“하늘과 땅을 보며 죽게 하지 않고

쇠붙이 무기를 보며 죽게 하지 않겠다.”라는 서약을 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상대방을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맹세였지만,

여황후는 이를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했다.

 

 

한신

 

한신을 죽일 때 자루를 씌우고 대나무 창으로 찔러 

‘하늘과 땅을 보지 않게, 쇠붙이 무기를 보지 않게’ 죽인 것이다.

 

 

다음은 전쟁영웅인 양왕(梁王) 팽월(彭越)의 차례였다.

여후는 팽월의 측근들을 협박해서

그를 반역죄로 모함하도록 한 다음 그를 처형했다.

그녀는 팽월을 하나의 시범 케이스로 삼았다.

 

그의 뼈와 살로 육젓을 만들어

각 제후들에게 보내어 엄중하게 경고하였다고 한다.

유방이 죽고 열여섯 살의 아들 영(盈)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여치는 태후의 신분으로 정사에 깊숙이 관여했다.

 

연적인 척부인에게 오랫동안 칼날을 갈아왔던 그녀는

유방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그녀에 대한 복수를 단행했다.

 

여태후

 

여태후는 척부인의 머리카락을 모두 자르고

팔다리에 수갑을 채워

죄수복을 입혀 감옥에 가두고 곡식을 찧는 고된 노동을 시켰다.

당시 여의(如意/척부인의 아들) 왕자는

조왕(趙王)으로 봉해져 임지인 하북(河北) 지방에 나가 있었다.

여태후는 아예 후환을 없애기 위해

여의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장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심성이 착했던 황제(劉盈/여태후의 아들)는

자신이 아예 성 밖으로 나가 어린 동생을 맞이하고

항상 그를 곁에 두면서 어머니의 음모로부터 보호했다.

 

그렇다고 순순히 포기할 태후가 아니었다.

여러 달이 지난 어느 겨울날 새벽, 황제가 잠시 사냥을 나간 틈을 이용해

태후는 여의(呂意)를 독살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여의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듣고 척부인이 원망하자

척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두 눈을 파냈으며

독한 증기를 쐬게 해서 귀를 멀게 하고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척부인을 “인간돼지”라고 부르도록 했다.

 

척부인의 비참한 모습을 본 어린 황제(惠帝) 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

황제 영은 자신의 친누나인

노원공주가 낳은 딸 장씨를 왕후로 맞이해야 했다.

즉 자신의 조카와 결혼한 셈이었다.

 

또한 황제의 후궁들이 낳은 아들들을

황후가 데려와 키우게 하고 생모들은 모두 죽였다.

혜제의 뒤를 이어 그가 후궁으로부터 얻은 두 아들(척부인의 손자)이

차례로 허수아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첫째가 유공(劉恭)이었는데,

4년째 재위하던 어느 날 자신의 친어머니가

태후 장씨가 아니라 할머니인 여태후에게 죽임을 당한

어느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한을 품었다.

 

이 사실이 여태후의 귀에 들어가자

그녀는 소년 황제를 가두어 놓고 굶겨 죽였다.

 

기원전 180년 어느 날 오랜만에 궁 밖으로 나갔던 여태후에게

개 한 마리가 갑자기 덤벼들어 그녀의 겨드랑이를 물었다. 

그일로 인해서 그녀는 병에 걸렸으며,

여태후는 그녀가 독살했던

유여의(劉呂意/척부인의 아들)의 귀신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지르며 두려움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하는데 향년 62세였다.

 

 

 

서태후

 

1835년 청나라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그녀가 바로 훗날 세상을 뒤집어버릴 서태후였다.

어린 시절 그녀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너무나 가난했던 그녀는 갖은 고생을 겪으며 성장했다.

시간이 지나도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자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자 그녀가 선택한 것은 '궁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6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황제를 보필하는 '궁녀'가 되었다.

하지만 꽤나 영특하고 욕심이 많았던 그녀는 궁녀의 신분에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황제의 눈에 들어 출세하고자 하는 남다른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발품 뛰며 야무지게 정보를 얻은 결과

당시 청나라 황제 '함풍제'의 이상형은

노래를 아름답게 잘하는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태후는 속으로 ' 만세'를 외쳤다.

사실 서태후가 얼굴은 그다지 뛰어나진 않았지만,

노래 하나만큼은 기깔나게 불렀던 것이다.

한껏 신난 서태후는 함풍제의 눈에 띄기 위해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러 재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완벽히 들어맞았다.

 

 

 

황제의 여자가 된 서태후

서태후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단단히 빠져버린

함풍제가 바로 그녀와 동침을 하게 되었다.

이때 당시 일개 궁녀가 황제와의 잠자리를 하는 것은 천운이 따라야만 가능했다.

어찌 보면 정말 대단한 여인이라 말할 수 있는데,

놀랍게도  서태후는 여기서 더 큰 행운까지 얻게 된다.

함풍제에게 정실부인과 후궁들이 존재했지만, 아이를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황실에선 대를 이을 후계자가 태어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서태후가 함풍제의 아이를 임신하고, 심지어 아들을 낳았다.

비록 후궁의 자식일지라도

여태껏 아들을 한 번도 낳아본 적이 없던 함풍제는 크게 기뻐했다.

 

사실 두 명의 태후를 편하게 부르기 위해

함풍제의 정실부인이 자금성 동쪽에 살았기에 동태후.

그다음 부인이 서쪽에 살았기 때문에 서태후로 부르게 된다. 

 

서태후는 유일한 아들 '동치제'를 낳고 어깨가 잔뜩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서태후는 생각 이상으로 야망가였다.

자식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권력에만 관심 있었다.

오죽했으면 '동치제'가 친모인 서태후를 무서워하고

오히려 온순하고 자애로운 동태후를 더 많이 따랐다.

이후 시간이 지나 청나라의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황제가 동태후에게 남긴 유서

 

청나라가 영국과 두 번의 아편전쟁에서 대패하고 굴욕을 맛보게 된다.

황실 전체가 피난에 가기에 이르렀고,

열강들과의 여러 조약으로 배상금은 물론 땅까지 다 뺏겼다.

이에 극심한 스트레스와 화병으로

함풍제는 31세의 젊은 나이로 병을 얻어 사망한다.

그런데 함풍제가 죽기 직전에 정실부인 동태후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서태후가 당신을 위협한다면 그냥 죽여버리시오"

 

서태후의 야망을 이미 눈치챘던 함풍제는

그녀가 걷잡을 수 없는 권력을 휘어잡기 전에 

죽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동태후는 이 유서를 고이고이 간직하였고, 

함풍제 다음으로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가 청나라 제10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1861년)

하지만 당시 동치제는 6살 나이였다.

 

그래서 동태후와 서태후가 함께 황제를 대신해 섭정을 하게 되는데,

서태후는 상상을 초월할 권력욕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동태후는 그다지 권력에 큰 관심이 없었다. 

타고나길 인자한 인품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이 넓은 인물이었고 글을 몰랐다.

그래서인지 사실상 서태후가 청나라를 꽉 쥐고

나라를 다스리게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실권을 갖고 있다 해도

서태후에게 동태후는 매우 거슬리는 존재였다. 

가뜩이나 아들이자 황제란 놈이

동태후만 좋다고 따라다니니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서태후의 심기를 강하게 건드리는 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서태후의 치밀한 계획

 

동치제가 결혼할 여자를 고를 때였다.

동태후와 서태후는 각자 집안의 여인을 신부를 추천해 주었다.

여기서 황제는 동태후 집안 여인을 황후로 맞이하였고,

서태후가 밀어준 여인은 후궁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한 성깔 했던 서태후는 이를 바득바득 갈게 된다. 

하지만 동태후에겐 비장이 무기 '유서'가 존재했으니

서태후가 맘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비록 친자식이 황제가 됐더라도 서역은 동태후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서태후는 한 가지 좋은 생각을 하게 됐다.

동태후가 감기로 고생하고 있던 때,

서태후는 동태후를 극진히 간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그녀의 병이 나을 때쯤 서태후는 팔에 붕대를 감고 동태후를 찾아갔다.

이에 동태후는 걱정되는 마음에 어찌 된 일인지 물었더니

서태후는 혼신의 눈물연기를 선보이며 말했다.

"점쟁이가 약에 사람의 피를 타서 먹이면

태후께서 병이 다 나을 거라 하여 제 피를 약에 넣었습니다.
다행히 병이 다 나아지셨네요"

 

이를 들은 마음씨 착한 동태후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본인을 위해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울어주는 서태후에게 감동을 받아 버린 것이다.

 

결국 동태후는 함풍제가 남긴 비장의 무기인 유서를

불태워 버리고 서태후를 믿기로 결심한다.

그리고는 얼마 후

동태후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뇌진탕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 죽음에 서태후의 독살설이 많은 이들에게 설득되고 있지만, 뇌진탕이었다. 

 

 

 

젊은 시절의 서태후

 

서태후의 세상

 

이제 눈엣가시 동태후가 사라졌으니 완전한 권력을 독점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서태후는 본격적으로 세상 최악의 악녀로 변모하게 된다.

 

먼저 서태후는 동태후 집안사람이었던

며느리와 아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구박과 쌍욕을 박았다.

 

이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 동치제가 1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기록된 사인은 천연두였지만, 어머니 서태후의 등쌀에 질려버려

환락에 빠져 살다가 매독 걸려 사망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당시 임신 중이었던 며느리를 끊임없이 핍박하였고

결국 며느리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며느리가 아들을 낳게 되면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이라 생각하여

이런 극악무도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어찌 됐던 피도 눈물도 없었던 서태후는 자신의 아들이 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걱정하기는커녕 재빠르게 꼭두각시 황제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서태후의 먼 조카이자 고작 3살이었던 아이를 황제로 앉히게 된다.

광서제 (청나라의 제11대 황제)

 

허수아비 황제 하나 앉혀 놓고 끝끝내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쥐며 섭정을 이어가게 된 서태후.

이런 그녀는 날이 갈수록 사치와 향락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전해진다. 

 

한 끼에 120개가 넘는 반찬을 즐기며, 그것도 하루에 4끼씩 먹었다.

또한 보석과 같은 사치품에 환장하였고,

3천 상자가 넘는 옷을 소지할 정도로 낭비가 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치의 끝판왕이었던 것은

 

 

서태후의 별궁 이화원
서태후의 별궁 이화원
이화원

'이화원'

이화원은 그녀의 별장으로

어마 무시한 크기를 자랑하였으며 무척이나 호화스러웠다.

여기서 생활하던 서태후는 명을 내렸다. 

"미소년들을 잡아와라"

그녀의 목적은 하나였다.

 

 

매일 밤 미소년들과 즐거운 쾌락을 맛보겠다!

 

서태후의  은밀한 사생활

 

서태후는 50대가 넘는 나이였지만 성욕은 왕성했고,

특히 젊고 잘생긴 남자를 매우 선호했다.

그녀는 이화원의 '남호로'라는 섬에 미소년들을 강제로 수용시킨다.

그리고는 하루에 한 명씩 불러 상상하기 힘든 뜨거운 밤을 보내게 된다.

또한 안타깝게도 그녀와 힘든 밤을 보낸 남자들은 그날 바로 죽어야 했다.

서태후와 관계를 맺은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외에도 젊어지기 위해 매일 젊고 예쁜 여자의 모유를 먹었다고 한다. 

한편 이처럼 서태후가 해괴망측한 것들을 벌이다 보니

어느덧 황제 '광서제'가 직접 정사를 돌볼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

이에 광서제는 막 나가는 서태후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는데 

하지만 앞으로 남은 건 더 미쳐 날뛰는

서태후의 막장 행보와 청나라의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나라의 몰락 원인

 

1. 서태후의 사치

당시 황제는 뒤에서 조종하는 서태후에 휘둘리느라

스스로 정치를 하지 못하게 되는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서태후의 관심을 돌리려

아편전쟁 당시 파괴되었던 이화원을 복원하는데 힘을 쏟게 된다.

​그 이후 서태후는 이화원 복원을 위해 사치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이화원 “곤명호(昆明湖)

 

2. 청일전쟁

1894-1895

19세기 후반 이홍장 등 양무파의 주도하에

청나라의 부국강병을 목표로 양무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홍장이 이끄는 양무파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패배한 원인이 일본의 빠른 신식군대에게 이기지 못했고

청나라 군대는 전쟁 당시 군수물자에 많은 돈을 들이지 못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전쟁도중 서황후의 환갑생일잔치가 있었고

이 생일잔치를 여는데에만 청나라 1년 재정의 3분의 1을 썼기 때문이다.

 

결국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이후 1895년

일본과 시코노세키 조약을 맺게 되었고

이로서 일본에 물어줘야할 배상금은

이전 난징조약과 톄진조약의 배징금의 몇 배에 달하는 어마한 금액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구 열강들은 중국의 이권 찬탈에 앞장섰고

이 과정에서 독일인이 칭다오 맥주 회사를 창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자 청나라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변법자강운동을 실시하였고

당시 황제는 외국어학교를 세우는 등 개방정책을 폈으며

이 과정에서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된 서태후를 몰아내기위한

쿠데타를 계획하기 위해 청일전쟁 이후

신식 군대의 수장인 원세개를 끌어들이게 된다.

이 때 원세개는 황제의 제안을 듣고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결국 이 원세개는 자신의 권력을 선택하게 되면서

황제가 아닌 서태후와 손을 잡아

이러한 황제의 계획을 다 낟낟이 일러바쳤고

이를 알게된 서태후는 화를 내며 광서제를 자금성에 가두었다고 한다.

 

3. 의화단

 

당시 서구 열강들이 계속 중국 본토로 들어와

이권을 침탈해 가는 상황이었으며

또한 여러번의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상당한 배상금을 갚아야 했다.

이러한 배상금을 갚는 사람들은 바로 청나라 주민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서양세력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이 갈수록 악화되어만 갔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중국의 ‘의화단’ 이다.

 

당시 의화단은

어린아이부터 나이든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모시는 신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손오공’ 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믿으며 서양 무기인 총은 들지 않은채

오직 검을 사용한 무술을 익히곤 했는데,,

“ 백일 동안 권법을 익히고 주문을 달달 외우면

창과 칼에 찔려도 피가 나지 않으며

400일 동안 수련을 계속하면 하늘을 나는 마법을 부릴 수 있을 것이다.” …

자신의 권력을 무시한채 이권을 침탈해가는 서양세력이

서태후 또한 맘에 안들었기 때문에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청조를 지키자는 같은 목표를 갖고 이 두세력은 손을 잡게 된다.

 

의화단은 이러한 서양세력들이 주둔하고 있던

베이징에 쳐들어가 서양인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였다.

 

이후 이러한 사건에 복수를 하기 위해 당시 강대국들이 연합하여

베이징을 공격하였으며 이들 또한 의화단 못지않게 잔인하였다.

 

이후 광서제는 결국 자금성에서 죽게되었고 이후로도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린 황제이자 마지막 청나라의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를 앉히고는

사치생활을 이어나가다 죽게되었고

죽으면서 까지도 온 몸에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하였다고 한다.

한 사람의 권력욕으로 인해

청나라라는 부국이 멸망하게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었고,

권력이라는 것은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서태후 실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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