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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손질하는 대원군 맏며느리 이씨마마

월광화 2014. 3. 27. 16:20

 

[한국의 보도사진]  단장하는 이씨 마마

 

 

영친왕 서거 소식을 전해들은 대원군의 맏며느리(고종황제의 형수)

이씨 마마는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다가 손님을 만나기 위해

상궁의 부액을 받으며 머리 손질을 하고 잇다.

 

1970년 5월 2일. 김홍기 기자

 

생존한 대원군 맏며느리 李씨마마

무엇이 비운(悲運)인가? 파란 많은 근세사(近世史)속의 이왕가(李王家)와 함께

마지막 전하(殿下)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종지부를 찍어버렸을때,

옛 왕가의 제일 높은 마마 노락당(老樂堂)

李씨(87·대원군(大院君)의 맏며느리=완흥군(完興君)부인)는

「만사가 귀찮다…」고 손을 저으며 자리에 누워버렸다.

「뉴스」의 유궁(幽宮)처럼 언제나 육중한 문을 굳게 닫아버린 운현궁, 그 안방 노락당에 잠입, 처음 공개하는 이 모습.

 

만인지상(萬人之上)이던 이왕가,

그중에도 옛 왕족들의 「안방」에서는

왜 늘 「뉴스」의 촉각을 피해왔을까?

관심을 둔 기자들이 해방 이후부터 줄곧 사양의 「안방마마」들에게

신경을 썼지만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어낸 일이 없었다.

 

더욱이 이은(李垠) -> 이구(李玖)씨의 낙선재 신관(新舘)쪽

현대파(現代派)보다 고종(高宗)황제의 생가(生家)이며

대원위 대감이 팔도강산을 호령했던 운현궁(蕓峴宮)쪽은

너무 깊숙해서 안방잠입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대원위 대감의 맏며느리가 지금까지 살아 있어?

「감춰진 사실」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사실」에

그때마다 말못할 감회를 느끼지 않을수가 없었다.

 

5월2일 하오 2시.

신문사 취재차에 고종황제의 손자며느리 한 분을 태우고

운현궁 옆 여도 골목에 멀찌감치 차를 세웠다. ]

 

운현궁에서 신문사차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이면

대문간서부터 「출입(出入)사절」을 당할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차 안에 앉은 채 기회를 노리기 1시간 30분.

대원군이 거처하던 사랑채 노안당을 거쳐 뒤채의

이노당(二老堂 -여기엔 대원군의 애손(愛孫) 이준용(李俊容)공의 부인

이씨가 기거했음), 이씨마마가 계시는 노락당에 들어갈때까지

좀처럼 집안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낙선재에서는 한참 영친왕(英親王)의 빈소가 벌어져 붐비는데

유궁(幽宮)같은 운현궁 안은 쓸쓸하고 조용할 뿐이다.

 

노락당 이씨는 마지막 전하 이은씨의 부음을 듣고

슬픔에 잠겨 두꺼운 요 위에 누워 계셨다.

방안은 약 5평. 잉어가 그려진 두폭짜리 병풍 하나와 조그만 의자가

몰락한 왕가의 현실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을뿐,

덩그맣게 큰 집안에 가난이 엿보인다.

 

무조건 이씨 마마에게 큰절부터 올리고 방 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동안 이씨 마마를 위로하기 위해 80객 노부인 2,3명이

소복을 하고 찾아왔다가 돌아갔지만 이분들이 누군지는 알 길이 없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운현궁 이씨마마는 당신에게 출입하는 사람이나

친구의 이름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히 싫어하신다고 한다.

 

-마마, 기념으로 사진 한 장만…

『이제껏 내 사진을 밖에 찍어 내보낸 일이 없소. 안 찍겠소』

-그러나 이왕가 에서는 어제 마지막 전하까지 가셨습니다.

마마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한 장만…

 

『내 늙은 얼굴을 찍고 싶지 않소』

그러나 대원군의 맏며느리이며 고종황제의 형수가 되는 이씨 마마가

「70년대 서울」의 공기를 오늘날까지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모로 따지든 「기록」이 될만 하다고 몇 번이나 간청했다.

뒷날을 위해서 당신의 모습을 한번만 「카메라」에 담자고 해도 거절.

나중에는 조카 며느리와 죽기전에 기념사진 한 장 찍어둔다는 전제밑에

반승낙을 한다. (이 때 모시고 있던 부인들이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고

이씨마마에게 귀띔했지만) 이씨마마는 영친왕의 죽음,

자신의 앞일등 알 수 없는 노후를 생각했음인지 심경변화를 일으켜

「사진만 찍는다」 고 일어나 앉아 머리에 빗질을하고 나더니

하얀 광목저고리를 위에 입는다.

 

「플래시」를 눌러 사진을 찍었다.

-요즘 무슨 음식을 즐겨 잡수십니까?

『미음』

한마디 하고서는 다시 요 위에 몸을 뉘며

『기사는 절대 쓰지말라』고 입을 봉해 버린다.

 

-대원군이 살아 계셨을 때 운현궁에 시집을 오셨죠?

『……』

-요즘 나도는 시아버님 대원군의 모습이나

민비(閔妃)의 모습은 틀린 데라도 혹시 없읍니까?

『……』

묻는 기자를 물끄러미 누워서 쳐다볼 뿐 모두들 묵묵부답(黙黙不答).

 

-저희들이 누군줄 아십니까?

『처음보는 얼굴들인걸』

-영친왕 이은 전하를 마마가 처음 보신 것은?

『여섯살 때 내가 무릎 위에 안고 있었소』

-오늘의 느낌은?

『만사가 귀찮소!』

벌써 이동안에 기자(記者) 잠입을 눈치채고 바깥채에 누가 연락했는지

방안으로 불쑥 들어와 「카메라」를 노려 보는

사랑채 남자일꾼(?)은 사뭇 시빗조다.

『누구냐?』

『무슨일로 여기까지 들어왔냐?』

잠입 불과 7분.

할수없이 뜰안으로 이씨 마마에게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뛰어 나왔다.

이렇게 운현궁을 비롯한 왕족 주변이 미묘하게

「차가운」데는 몇가지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의친왕(議親王) 이강(李剛)공의 아들간에는 무슨 일에선지

「차가움」이 감돌고 운현궁 쪽에서는

억대가 넘는 재산관리를 놓고 왕족간에 뒷공론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영휘원(永徽園)의 엄비(嚴妃) 무덤에서는 몇 년째

시제(時祭) 한번 못올리고 있으며,

어느 고종황제의 손자는 방 한칸조차 없어서 사당(祀堂)

「시멘트」 바닥 위로 쫓겨나서

잠을 자고 있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날아가는 새를 쳐다보기만 해도 죽지를 떨었다는

운현궁의 10년세도.

오늘날은 방한칸 없이 내쫓겨 비운의 몰락을 울고 있는 왕족들.

마마 이씨의 심정은 지금 어떨까?

산하(山河)가 함께 울 만한 슬픔이,

이야기가, 목격담이, 이면사(裏面史)가 이뤄진

뜰안에 살면서도

입을 열지 않으니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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