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가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어 병이 난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얼굴이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고,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
<인조실록> 23년 6월 27일 기사
34살의 비극적인 죽음,
조선을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할려던 한 인물의 죽음에 대한 기사였다.
의학에 문외인인 사관의 기록조차도 약물에 중독되었다고 표현할 만큼,
소현 세자는 보통 죽음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죽음에 대한 의혹은 그 이후에 벌어진 상황으로 짐작하게 해준다.
아버지인 인조는 기년복(1년복)을 입었고, 신하들은 시마(3개월복)을 입었다.
<인조실록>의 사관의 의견에는 의례에 따라 임금은 장자를 위해,
참최 3년복을 신하는 임금의 부모와 처자를 위해
기년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나왔지만,
인조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더구나 종법에 따라 세자가 죽으면 세손인 원손 석철이 그 뒤를 이어야 함에도,
영의정 김류을 끌어들여 예종과 성종의 예를 들어 둘째인 봉림 대군을 세자책봉을 강행했다.
그 후 인조는 단지 조작에 불과한 세자빈인 강씨를 인조를 독살했다는 음모로 사약을 먹이고,
그 아들들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어 둘을 죽이고 말았다.
오죽하면 <인조실록>의 사관조차도 가혹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무엇이 아버지가 아들의 모든 것을 부정한 것일까? 이제부터 그것을 살펴보도록 한다.
소현 세자가 죽기 10년 전 1637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개국 이래 최악의 치욕을 당한 조선 조정은 또 한번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바로 왕자의 인질 문제, 당시 청나라는 더 이상 조선의 반항을 막기 위해,
인조의 아들은 물론 육판서의 자제까지도 인질로 요구했다.
당시 호조판서인 김신국은 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병을 핑계로 물러나 조정을 떠들썩하게 했다.
문제는 세자인 소현 세자 인질 문제였다.
당시 주화파였던 최명길은 되도록이면 왕위 계승자인,
소현 세자를 인질로 보내지 않도록 조건을 완화시키도록 청과 협상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소현 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사가 이미 누란에 처해있는데 어찌 내 한 몸을 생각하겠는가?
나에게는 아들도 있고 동생도 있으니 능히 종사를 받들 수 있다.
내 한 몸 죽는다고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그의 증조할아비인 선조는 쳐들어오는 왜군에 맞서지 않고 요동으로 피신할려고 했고,
자신의 아버지인 인조는 병을 핑계로 끝까지 청나라의 입조를 거부한 것을 보면,
소현 세자의 행동은 그야말로 보기 드문 행동이었다.
더욱 눈 부시는 건 심양에 끌려간 이후의 일이었다.
소현 세자는 심양관에서 조선과 청나라의 껄끄러운 사안을 처리하는데 고심했다.
그를 가장 괴롭혔던 건 당시 명나라 정벌을 위한 조선 군대 요구와,
반청인사로 지목된 조선인 인질 보호 문제였다.
소현 세자는 조선의 입장에서 최소한이나마 희생을 줄이려고 청나라와 협상을 했고,
그러기 위해서 청나라의 실력자인 용골대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미 외부의 청나라보다도 내부의 농민군에게 멸망해가고 있었다.
환관의 전횡과 탐관오리의 부패에 견디다 못한 이자성의 군대가 마침내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점령하자 이를 방관하던 산해관의 오삼계가 청나라에게
"명나라 황제를 죽인 유적을 정벌"하기 위해 오랑캐인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이게 된 것이었다.
오랫동안 만리장성을 넘지 못하던 청나라 군대는 오삼계의 협조로 만리장성을 넘게 되었고,
청나라 군대는 물밀듯 북경으로 향했다.
이 사실을 안 이자성 군대는 청나라 군대를 피해 북경을 비었고,
청나라 군대는 북경을 무혈입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행동에 인조를 비롯한 반청세력에게 불만을 사게 된다.
반청세력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굴복한 듯 하면서도,
명나라에게 밀사를 보내어 조선의 상황을 설명해 이해를 구하려고 했다.
소현 세자는 약 두 달간 북경에 머물게 되는데 이곳에서,
아담 샬이라는 예수회 선교사와 만나게 된다.
아담 샬은 로마 교황청에서 유럽에서 신교의 영향력에 밀린,
카톨릭 부흥을 위해 남미와 아시아에 전파하는 예수회였다.
1628년에 파견된 그는 해박한 과학지식으로 명나라 신종의 신임을 얻었고,
청나라 세조 또한 그의 과학지식을 우대해,
흠천감정이라는 천문대와 대청시헌력을 제작하게 했다.
아담 샬은 북경 동안문에 거주하면서,
선무문내에 마테오 리치가 세운 남천주당에 자주 머물렀고,
소현 세자는 동안문 내 아담 샬의 숙소와 남천주당을 자주 찾아 교분을 가졌다.
동화문의 문연각에 거처하던 소현 세자의 처서는 아담 샬의 거처와 가까웠다.
소현 세자는 이미 병자호란 이전 견명사로 파견된 정두원으로부터,
화포나 망원경(천리경)등의 서양문물을 통해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아담 샬을 통해 마침내 조선을 개방된 사회로 이끌기로 결심한다.
그의 생각은 1844년에서야 개방하는 청나라보다도 200년이 앞선 생각이었다.
이 만남 직후 청나라는 소현 세자의 귀국을 허락했고,
이때 세자는 이방송 등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를 대동하고 귀국했다.
하지만 이런 소현 세자의 행동은 이미 인조에게 보고되었고,
이미 앞서 말한 듯 인조의 냉담을 사게 되었다.
야사에 속하는 <조야첨재>에는,
소현 세자가 청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벼루를 인조에게 진상하자
인조가 벼루를 던졌다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소현 세자와 인조의 사이는 격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소현 세자는 병을 얻었고,
의관 이형익의 치료를 받던 소현 세자는 곧 죽게 된다. 병명은 학질,
하지만 앞서 실록의 기록처럼 소현 세자의 죽음은 약물중독에 가깝다.
당시 무원록같은 현대 의학에 버금가는,
조선 의학이 학질과 약물중독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무식하지 않다.
하지만 인조는 철저하게 소현 세자의 죽음 의혹을 감추는데 급급했다.
대사헌이었던 강문현이 이형익의 처벌을 요구하자,
인조는 오히려 강문현을 유배보내게 된다.
세자빈 강씨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이미 인조의 의심은 소현 세자의 죽음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세자빈 강씨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인조는 세자빈의
왕곡마저도 허용하지 않는 채 그대로 돌려보냈다.
대신들이 그렇게 간절하게 요구함에도 인조가 거절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현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용골대가 그에게 전복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소현 세자는 임금이 입는 옷이라고 거부했는데 이 사실을 들은
인조는 청나라와 소현 세자가 자신을 몰아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의 생각일 뿐 정상적으로 왕위에 올라갈 소현 세자가
굳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올라갈 필요성이 거의 없는 판국에,
인조의 행위는 자신이 그렇게 비윤리적이라고 규탄했던,
광해군보다 더한 죄악을 저지른 셈이다.
일부에선 인조 때의 소현 세자 죽음을 영조 때의
사도세자 죽음과 비유하지만 그것은 비교 자체가 되지 못한다.
최소한 영조는 사도세자가 자신의 왕권에 도전한 것에 대해 응징했지만,
최소한 죄 없는 왕손만은 죽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왕은 조선 후기를 화려하게 장식하여 세종대왕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받는
정조였으니 최소한 영조의 행위는 인조보다는 훨씬 낫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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