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초상화)
(광해군, 초상화)
우리 조선 왕조에서 왕위에 올랐으 되, 재임 중 잘 못 된 처세로
왕으로 인정 받지 못한 인물이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그리하여 '왕'으로 인정 받지 못 하고 왕자 시절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것이다.
'연산군'은 알다시피 나라를 망치려 작정한 듯
무법적 반인륜 '폭정'으로 '중종반정' 때 쫓겨난 인물이다.
일각에선 그가 어머니 '폐비 윤씨'의 비참한 죽음을 겪은 충격으로
이상 성격이 됐을 거란 동정론을 펼치지만,
누구도 그가 '폭군'이란 점은 의심치 않는다.
'광해군'은 어머니(계모)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친형 '임해군'과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죄로 이른 바
'폐모살제'를 저질러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왕이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왕권 찬탈'을 위해 손에 피를 안 묻힌 왕이 어디 있던가.
조선의 기틀을 확립한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대신해 숱한 정적들을 죽였으며,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2번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인 후에 왕좌를 차지했다.
(광해일기)
근래 들어선 역사학자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여러 사료를 통해
'광해군'을 '연산군'과 달리 '폭군'이 아닌 15대 '조선의 왕'으로 재인식 하고 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다.
왕비 '의인왕후'는 좋은 가문에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었으나 후사를 낳지 못 했다.
그러던 중 '선조'가 궁궐 요리를 담당하던,
나인 '공빈 김씨'와 눈이 맞아 첫 아들 '임해군'과 둘째 '광해군'을 얻었다.
'광해군'의 '출신'에 대한 열등감이 이 때 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 '임해군'은 성격이 부정하여 일찌감치 후계자에서 제외 되었고,
지혜롭던 '광해군'이 후계자로 거론됐다.
그러나 이 또한 왕가의 정통성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사대부들의 반발을 샀다.
한편 1592년,
일본은 대륙과 직접 교류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전부터 일본의 낌새를 보고 받았으나 조정 대신들은 이를 무시했고,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당해야 했다.
급기야 '한양'이 함락되고 '선조' 임금은 왕족과 친족들을 데리고 평안도 '의주'로 피난을 떠났다.
대신 '광해군'이 빈 궁궐에 혼자 남아 의병을 조직하여 말을 타고 전장에 뛰어 들어 진두지휘 했다.
결국 '명'의 지원과 이순신, 곽재우 같은 걸출한 장군들의 활약으로 일본을 퇴각 시켰다.
한양으로 돌아 온 '선조'는 광해군의 충성심에 왕세자로 지목했으나,
이번엔 차남이란 이유로 명나라로 부터 거부 당했다.
1600년 '선조'는 첫 부인 '의인왕후'가 사망하자
50세가 넘은 나이에 19살의 앳된 '인목왕후'를 들였다.
당시 '광해군'의 나이 28살이었으니, 9살 어린 새어머니를 맞은 셈이다.
그리고 '인목왕후'가 2년 후 아들 '영창대군'을 낳음으로써 '광해군'의 입지는 더 곤란해졌다.
서자 '광해군'이 넘기엔 적자 '영창대군'은 너무 높은 벽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광해군'을 왕위 승계자로 유언하였기에 우여곡절 끝에 왕좌에 오를 수 있었다.
누구보다 임진왜란의 비참함을 잘 아는 '광해군'은 흩어진 국토와 국론을 수습하는 데 열을 쏟았다.
이 당시 세계 정세는 최강국이었던 명나라가 기울고,
후금(후에 청나라)이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후금에 침략받은 명이 다급하게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막 전쟁을 끝낸 조선이 강대국 틈에 휩쓸리는 것을 막기 위해
'광해군'은 쉽사리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일로 '영창대군' 옹립을 주장하던 '소북파'들은
명과의 의리를 들어 '광해군'을 더욱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광해군'은 '명분'과 '실리'를 잃지 않을 '양다리 외교'를 펼쳤다.
그래서 명에 파견 될 '강홍립' 장군을 은밀히 불러,
적당한 시기에 후금에 백기 투항할 것을 지시했다.
썩은 동아줄을 잡아 봤자 곧 끊어질 걸 알았던 거다.
전쟁터에서 조선군들이 멀쩡히 살아 돌아오자,
내막을 안 조정 대신들은 명을 배신한 이유로 '광해군'에게 크게 반발했다.
이괄의 난
유교 사관이 조선의 기강과 법리를 완성 시킨 것은 맞지만 유교를 공부하는 사대부들이,
위기 때 마저 명분을 앞세워 이상과 현실을 착각한 대표적인 오류 사례였다.
이즈음 내노라 하는 양반집 서자 7명이 은전 수백냥을 강탈하고,
상인을 죽인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들이 관가에 끌려 가 발설하기를,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던 자금으로 쓸 예정이었으며,
배후가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라 하니,
조정은 또 한번 발칵 뒤집혔다.
그리하여 '인목대비'를 폐위 시켜 내쫓고,
반역죄를 물어 일가를 멸문지화 했으며 관련자들을 모두 처형했다.
그리고 자신의 존립에 위험 존재였던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 보낸 뒤 방에 가둔 채 여러 날 불을 떼워 죽게 하였다.
이는 '광해군'의 의지가 아닌 그를 둘러 싼 당쟁 원흉들의 견제 때문이었다.
영창대군 측인 '소북파'를 제거 하기 위한 '대북파'의 계략.
어째튼 이 사건은 예와 도리를 중시하던 유교 사회, 특히 성리학자들에겐
하늘 아래 있어선 안 될 패륜의 왕이었으므로 '광해군'을 내쫓을 좋은 명분이 되었다.
그리하여 '광해군'은 소북파의 꼬드김을 받은
이복 동생 '능양군'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폐위 돼 강화도로 유배 되었다.
복권 된 '인목대비'는
아들을 죽이고 일가를 몰살한 '광해군'을 똑같이 죽여달라 명하였으나,
前 왕을 죽이지 않는다는 왕가의 전통에 따라 귀양만 보내게 됐다.
(인목대비 친필 족자)
인조대왕 탱화
그렇다면 '광해군'을 물리친 '능양군', '인조'의 정치는 어땠을까.
조선은 왕조를 이어 갔지만, 실제론 '신권(臣權)'의 정치였다.
게다가 유학을 공부한 사대부들은 정파를 나누어 붕당 정쟁 밖에 할 줄 몰랐으며,
왕들은 이 틈에서 왕권을 지키기 위해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인조'도 자신의 배후 뜻을 따라 명나라를 다시 받들고,
'오랑캐'라 불리던 후금을 배척하는 '친명배금' 정책을 썼다.
이는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후금의 심기를 건드렸으며,
급기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또 다시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다.
청태종 홍타이지
삼전도의 굴욕
그 뿐인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청나라로 이름 바꿔 재침입한,
'태종'에게 무릎을 꿇어 세번 절하고 세번씩 머리를 박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굴욕을 치뤄야 했다.
이것이 현재 송파구 '삼전동'이 유래 된 '삼전도의 굴욕'이다.
만약 광해군이 왕권을 계속 유지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좀 더 발전 된 사회가 됐을 것이다.
백성들이 그 끔찍한 전란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강대국에 질질 끌려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순리에 따라 아들 뻘이었던 아우 '영창대군'에게
후왕 자리를 물려 주었다면 왕실의 정통성도 회복했을 터였다.
만약 그랬다면 '광해군'은 '폭군'이 아닌
'세종대왕' 이후 후세에 남을 '성왕'으로 불렸을지 모른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재조명 돼야 한다.
시대가 원했던 유능한 왕이었지만,
반면 시대에 거부 당한 왕이기도 했다.
'광해군'이 '구국의 왕'으로 완성되지 못한 건,
붕당정치로 당리당략이나 일삼던 지긋지긋한 사대부들의 공작 때문이었다.
광해군묘 측면
광해군묘 후면 전경
광해군묘 정면도
사적(史蹟) 제363호 남양주 광해군묘 (南楊州 光海君墓)
지정일 : 1991. 10. 25.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59외
시 대 : 조선 시대 관리자 : 사릉관리소
어머니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생모인 성묘(공빈 김씨)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묻혔다.
옆에는 왕비였던 문성군부인 유씨의 묘이다
광해군은 대궐 뒷문으로 피신하여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서 체포되어
서인(庶人)으로 내리는 동시에 강화(江華)로 귀양보내졌다.
그후 다시 제주도(濟州道)로 유배시켰는데 인조(仁祖) 19년(1641) 7월에 사망하자
그곳에 묻혔다가 동왕(同王) 21년(1643)에 지금의 묘소(墓所)에 천장(遷葬)되었다.
문성군부인유씨(文成郡夫人柳氏)는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유자신(柳自新)의 여(女)로 선조(宣祖) 31년(1598)에 태어났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卽位)하자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고,
광해군과 같이 폐위(廢位)되어 강화(江華)로 함께 유배(流配) 당하였으며
유씨(柳氏)는 이곳에서 인조원년(仁祖元年)(1623년) 10월 8일 사망하였다.
동년(同年) 10월 30일 양주군(楊州郡) 적성동에 장사(葬死)했다가
광해군사후(光海君死後) 같은 묘역(墓域)에 천장(遷葬)하였다.
광해군(光海君)과 부인유씨(夫人柳氏)의 묘(墓)는 쌍분(雙墳)이며,
묘(墓)의 시설(施設)은 봉분(封墳) 곡장(曲墻)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등이 있으나 초라하다.
기록은 광해군묘비명(光海君墓碑名)이 '광해군지묘(光海君之墓)'이고
비후면(碑後面)에 '신사칠월초일일병졸어제주명철조삼일
(辛巳七月初一日病卒於濟州命輟朝三日)'이라 새겨져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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