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의 명호 (1)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南無觀世音菩薩摩訶薩)
세상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소리에 응하시는 보살.
관세음! 관세음은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조용히 살핀다’는 뜻입니다.
실로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응하여 답을 주시고 고통을 여의게 하는 분입니다.
소리! 이 세상에 메아리 없는 소리는 없습니다.
메아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작은 울림들이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메아리는 이미 도달하였지만 우리의 귀가 열려 있지 않아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세상 모든 중생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중생들이 관세음보살님을 찾는 생각의 파장을 일으키면, 관세음보살께서는
그 생각의 파장을 감지하여 답하는 메아리, 가피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의 명호 (2)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南無大勢至菩薩摩訶薩)
대자비 대지혜의 광명으로 우주를 가득 채우고 계신
관세음보살님은 너무나 자애롭습니다.
이로 인해 우매한 중생들이 자칫 버릇없이 함부로 대할 수가 있으며,
그것이 중생에게는 새로운 업이 됩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께서는 스스로 위덕과 위엄의 상을 나투셨으니,
바로 그 이름이 ‘대세지(大勢至)입니다.
마치 아이들을 자애심만으로 키우면 버릇없는 아이가 될 수 있으므로,
때로는 엄격하게 위덕과 위엄으로 다스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의 무한한 자비심에 귀의함과 동시에
그릇됨을 막는 대세지보살의 위덕과 위엄에 귀의하여
‘나’ 스스로의 자비심과 위덕과 위엄을 일깨우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의 명호 (3)
나무천수보살마하살(南無千手菩薩摩訶薩)
반복되는 말이지만 ‘천개의 손’이란 우주에 가득차 있는 자비를 베푸는 손이요,
중생 스스로가 간직하고 있는 무한능력을 발현하는 손입니다.
관세음보살의 명호 (4)
나무여의룬보살마하살(南無餘意輪菩薩摩訶薩)
그렇게 되고 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뜻과 같이’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발원문을 외우며 축원을 합니다.
“내 이름을 듣는 이는 삼악도를 벗어나고, 내 모습을 보는 이는 해탈을 얻어 지이다.”
참으로 거창한 축원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축원처럼 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마음자리를 찾고 찾아 ‘나’ 속의 자비심이 온전히 발현되면
이러한 축원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억지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행이 아니라, 행하는 그대로가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이 여의륜입니다.
‘나무여의륜보살마하살’은 마음의 문을 열어 중생의 뜻대로
바퀴를 굴리는 내 마음 속의 여의륜보살님께 귀의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수보살께 귀의하면서 , 비록보이지는 않지만
‘나’ 스스로 지니고 있는 수많은 손으로 중생들의 손을 잡아주고
관세음보살의 명호 (5)
나무대륜보살마하살(南無大輪菩薩摩訶薩)
대륜보살 또한 여의륜보살의 다른 이름이며,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대륜보살의 ‘대륜(大輪)’은 큰 바퀴입니다.
소승적인 바퀴가 아니라 중생 모두를 위하는 대승의 바퀴입니다.
그리고 그 바퀴가 크다고 하였지만, 실은 ‘크다. 작다’는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한 크기입니다.
모든 상대적인 개념을 벗어나 오로지 베풀고 구하고
대해탈의 법륜을 굴리는 분이 대륜보살, 바로 관세음보살인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의 명호 (6)
나무관자재보살마하살(南無觀自在菩薩摩訶薩)
관자재보살의 ‘관자재(觀自在)는 ’보는 것을 자유 자재로이 한다‘는 뜻입니다.
우주 전체와 한 몸인 관세음보살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중생들의 아픔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한자리에
가만히 계시면서도 모든 세계를 꿰뚫어봅니다.
그분은 멀리 보타낙산에 계시다가 중생의 신음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게는 이미 너와 나가 하나요, 여기와 저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없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자유 자재롭게
중생의 고통을 관찰하고 그들에게 행복과 안락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이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관자재’가 우리들 마음자리의 능력이라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관세음보살의 명호 (7)
나무정취보살마하살(南無正趣菩薩摩訶薩)
관세음보살님은 모든 중생의 소원과 함께하지만, 삿된 길과는 함께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正趣)’에 초점을 맞추고 계신 것입니다.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는 이들로 하여금 방법상으로 둘러가게 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그것이 씨앗이 되어 바른 길로 나아가게 만드는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정취보살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무정취보살마하살’을 염할 때는 언젠가는
바른 길로 나아가 근본 마음자리를 깨닫겠다는 원을 발하여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의 명호 (8)
나무만월보살마하살(南無滿月菩薩摩訶薩)
우리가 정취보살의 바른 길로 나아가게 되면 근본 마음자리를 완전히
깨달아 모가 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만월을 이루게 됩니다.
둥글고 둥근 그 만월은 ‘나’의 마음자리를 완전히
깨달아 8만4천 보리(菩提)로 바꾼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만월보살이 되면 성을 내고자 하여도
성을 낼 수 있는 기운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모든 기운이 완전히 만월로 바뀌고 나면, 우주
그 자체의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의 명호 (9)
나무수월보살마하살(南無水月菩薩摩訶薩)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만월은 ‘천강유수천강월(千江流水千江月)’이 됩니다.
일천 개의 강에 물이 있으니 일천 개의 강마다 달이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릇에 물을 담으면 이 그릇 속에 달이 하나 비치고,
저 그릇에 물을 담으면 저 그릇 곳에 달이 하나 비칩니다.
작은 접시 물에도 큰 호수에도 달이 하나씩 비칩니다.
관세음보살은 마치 이 수월과 같아서 어디에서나 같은 모습을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자리도 평등한 수월과 같아서 나와 너의 구별이 없고,
친하고 친하지 않은 구별이 없습니다.
관세음보살의 명호 (10)
나무군다리보살마하살(南無軍多利菩薩摩訶薩)
범어인 ‘군다리’는 감로병으로 번역됩니다.
이 감로병은 모든 중생들이 필요로 하는 감로수를 담은 자비의 상징물이요,
그 속에 있는 감로수는 써도 써도 줄어들지 않는 무한 존재세계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픈 중생에게 약이 되고
주린 자에게 밥이 되며 목마른 자에게 물이 되고
피로한 이에게 상쾌함을 주는 무한의 자비심, 군다리보살님께 귀의를 합니다.
아울러 ‘나’의 몸 안에도 마르지 않는 감로의 샘이 있어, 군다리보살님께 귀의하며
그 마음의 고향을 일깨우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세음보살님과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에 귀의하는 것이
‘나무수월보살마하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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