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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貞純王后)

월광화 2015. 10. 2. 18:30

 

 

정순왕후 산소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1745년 12월 2일 (음력 11월 10일)

1745년 12월 2일 (음력 11월 10일) ~1805년 2월 11일 (음력 1월 12일)는

조선의 ~21대왕인(英祖) 영조의 계비이다.

 

정식시호는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정현소숙정헌정순왕후

(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正顯昭肅靖憲貞純王后)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徐氏)가 죽자

1759년(영조 35) 왕비에 책봉된 뒤 가례를 행하고,

1772년에는 예순(睿順)을 비롯하여 성철(聖哲)·명선(明宣)·융인(隆仁) 등의 존호를 받았다.

 

영조 시대

강빈(姜嬪)의 신원을 주청하다 장살당한(金弘郁)의 김홍욱 현손인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로 현재의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 생애

1745년 정비인(貞聖王后)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는 부왕인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들 중에서 새 왕비(王妃)를 책봉하지 않고,

1759년 6월 9일 간택을 통해 김한구 (金漢耉)의 딸을 새 왕비(王妃)로 간택하여,

같은 해, 6월 22일에서 창경궁 혼례를 올렸다.

당시 영조의 나이는 66세, 정순왕후는 15세로 조선 개국 이후,

가장 나이 차가 큰 혼인이었고 그가 왕비(王妃)에 책봉될 때

부모 내외는 물론 조부도 김선경 생존하고 있었다.

 

심지어 1735년에 태어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보다 10살이 어렸다.

간택 당시의 일화로

영조는 간택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는데,

다른 규수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는 답을 했지만,

유독 정순왕후는‘인심이 가장 깊다’고 답하여 영조의 눈길을 사로 잡았으며,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목화꽃은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 백성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꽃이니,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로 영조를 감탄시켰다고 한다.

 

왕비 책봉 이후에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답하여

어린 나이에도 왕비(王妃)의 체통을 중시하였던 그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소생은 없지만 사도세자와의 사이에 틈이 생겨 참소가 심하더니,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나언경(羅彦景)이 사도세자의 부도덕과 비행을 상소하자

서인(庶人)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생애 중반 정조시대

 

영조 후기 영조의 양대 척신 가문인

정순왕후의 친정 오라비 김귀주 및 경주 김씨(慶州金氏)측과

혜경궁 홍씨 친정 풍산 홍씨(豊山 洪氏)측은 영조 말년에 계속적으로 대립했다.

부왕 영조가 승하하고 손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왕대비(王大妃)로 승격되었으며,

홍인한 , 정후겸 등 영조 척신 일파의 숙청을 단행했다.

 

정순왕후의 동기인 김귀주는 영조 시기에

후일 정조가 중용하는 청명당과 함께 행동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한성판윤을 제수받고 홍인한 , 정후겸 탄핵에 동참했다.

그런데 정조는 홍인한 , 정후겸에 대한 처분이 마무리되자마자

김귀주가 혜경궁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흑산도로 귀양보냈다.

 

이 날 연석에서 정조는 김귀주를 귀양보낸 실제 이유는,

영조때 김귀주가 외조부 홍봉한을 탄핵한 데 있음을 밝혔다.

 

이로 인해 정조와 정순왕후 사이에 어떤 긴장 관계가 생겼는지 여부는 현재로선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듬해 홍인한 , 정후겸 처분에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홍보하기 위한 책《명의록》을 편찬하였을 때,

이 책 속에서 '세손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내전이 안에서 세손을 도와,

세손이 무사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을 수록하여,

그가 정조 즉위에 공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대내외에 밝혔다.

 

이 부분은 정조 사후 간행된 《정종대왕행장》과

정순왕후 사후에 간행된 그 자신의 《행장》등에서 재확인되는 내용이다.

 

흔히 세간에는 정순왕후와 정조가 극심한 대립관계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와 정순왕후의 대립관계는 기록되어 있지 않음)

《일득록》에는 정순왕후를 향해 친밀한 감정을 나타내는 기록이 전하고,

정순왕후는 정조의 행록을 쓰며 정조가 자신을 극진히 공양했음을 과시하고 있다.

 

말년 순조시대

1800년 손자 정조가 승하하고 증손자인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대왕대비(大王大妃)로 승격되었으며 정순왕후는 왕실의 제일 큰 윗전,

즉 대왕대비(大王大妃)로서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행하였다.

 

이 시기에 정순왕후가

여군(女君) 여주(女主)를 자칭하는 것을 두고 본인이 여자국왕,

여자임금 임을 자처한 것이라는 해석이 한동안 주류를 이뤘으나 이는 완전한 오류이다.

 

여군, 여주는 모두 동양권에서 왕후 등이 사용하였던 용어이며,

정순왕후 외 조선의 다른 대비들이 사용한 기록이 다수 존재한다.

정순왕후는 정조 생전에도 여군(女君)을 자칭한 기록(정조10년 12월 1일)이 있으니

이것이 '여자 임금'이라는 의미일 수는 없는 것인데,

전술한 통설은 이러한 점을 완전히 간과한 오류를 범하였다

 

정순왕후는 자신과 대립되는 소론 시파들을 대거 숙청하였으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과 혜경궁홍씨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을 처형시켰고

정조가 설치한 장용영을 폐지하였으며,

정조가 묵인하던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여 남인과 소론 시파들을 축출하였다.

 

또한 정조가 내쳤던,

김관주(金觀柱)와 김용주(金龍柱)등의 노론 벽파 관료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1802, 정조의 유지에 따라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책봉하고,

김조순을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하고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1803년 12월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김조순에 의해 대부분의 벽파관료가 숙청되고,

자신의 영향력도 약화되어 허망한 말년을 보냈고,

1년 뒤인 1805,1월12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내에 위치한 원릉(元陵)으로 영조와 함께 묻혀있다.

 

신유박해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며 천주교를 묵인한 정조와는 달리

천주교를 강경하게 탄압하였으며 급기야는1801 음력 1월10일,

사학(邪學, 천주교)의 엄금을 하교하여,

세계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큰 교회박해 인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켰다.

 

 

이러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정책은 천주교를 묵인하던

정조의 천주교 해법론을 오히려 천주교를 확산시키는 무능한 해법으로 규정하여,

정조의 천주교 해법론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정적인 남인과과 시파(時派)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 숙청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 출신인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과 이승훈이 처형되었으며,

이미 배교한 이가환도 장살당하였으며 정약용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신유박해 이후 정약현(丁若鉉, 정약용의 맏형)의 사위인 황사영(黃嗣永)에 의해

황사영 백서사건이 벌어짐으로써 조선 내에서의 천주교 탄압은 더욱 거세어졌다.

 

그 뒤 당쟁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 것에 반대하는 벽파(僻派)를 항상 옹호하였으며,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벽파인 공서파(攻西派) 등과 결탁,

정치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시파 등의 신서파(信西派)를 모함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가환(李家煥)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丁若鍾) 등 간부들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귀양갔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恩彦君)과 그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되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과단성 있는 정치수행으로 흐트러진 질서를 다시 찾고 국가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시호는 예순성철명선융인정순왕후(睿順聖哲明宣隆仁貞純王后)이고,

능호는 원릉(元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좌측이 영조임금 묘, 우측이 정순왕후 묘

 

 

좌측이 영조임금 묘, 우측이 정순왕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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