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담배 얘기를 해볼까 한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이후로 대략 1610년 이후 광해군 즈음에 일본을 통해서,
그리고 북경을 내왕하는 상인에 의해 들어왔다.
그 당시 담배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반응이 어땠을까?
담배의 첫 맛은 고약한데 지나고 나면 다시 찾게 되고,
피울 때는 뭔가 몽롱한 것이 머리를 맑게 해주는 듯한
중독성 내지는 환각성이 대마초에 버금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대마초는 국법으로 금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담배가 대마초 대용으로 널리 확산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담배 모습은 그 크기나 모양이 갈수록 진화하고 발전되었지만
우리나라에 담배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잎을 그냥 둘둘 말아서 피우거나
담배 잎을 잘게 잘라 곰방대에
꾹꾹 눌러 피우는 형태로서 니코틴 흡수율 100% 였다.
요즘은 불량한 청소년(?)을 빼고는 성인 남녀라면 자유롭게 담배를 피우는데,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담배는 어른이나 지체 높은 사람의 권위를 상징하였었다.
그래서 어른이나 지체가 높은 사람 앞에서는
담배 피우는 것을 삼가하였었는데 그 유래는 이러하다.
대궐에서 신하들이 정사를 논의하는 중에 담배를 많이 피우자,
연기의 특성상 자꾸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임금의 자리는 신하들 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는데,
담배 연기가 임금에게로 자꾸 가다 보니 그것을 참다 못한 임금이
임금 앞에서는 담배를 삼가하라고 한 것이,
그 후 어른이 있는 데서는 담배를 삼가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조선의 임금 중 유달리 담배를 사랑한 임금이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좋은 말로는 애연가, 속어로는 골초이다.
최초로 안경을 쓴 국왕이자 ‘골초’이기도 했다.
그는 바로 정조 임금이다.
정조는 우리 역사 교과서에 탕평책으로 유명하다.
붕당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취한 개혁정책으로
규장각(일종의 국왕직속의 정책연구기관)과
장용영(국왕친위부대)을 설치하고,
신해통공(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한 정책) 실시,
수원화성 건립, 법전인 대전통편 편찬 등 업적이 대단한 임금이다.
하지만 정조는 담배에 관해서는 예찬론자로서,
오히려 백성들에게 담배 피우기를 권장하기까지 한다.
정조가 담배를 권장하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 담배만한 것이 없다.
이 풀이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풀어주지 못한다.
담배를 백성들과 함께 함으로써 그 혜택을 함께 하고자 한다.'
그러면 왜 정조는 요즘으치면 골초라고 할 만큼 담배를 즐겨 했을까?
정조는 어렸을때부터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에다,
할아버지인 영조의 호령에 놀라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지냈고,
심지어 끊임없이 목숨을 노리는 무리들 때문에
임금자리에 오를 때까지 사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왕이 되고서도 과감한 개혁으로 탕평책을 쓰고,
많은 정책들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노심초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복잡한 생각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자 담배를 가까이한 것으로 짐작된다.
정조 임금이 애연가가 된 것은 아마도 붕당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개혁정책 마련을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그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세자시절부터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운명으로,
정순왕후를 비롯한 반대세력들과의 대립속에 살아야 했던 정조,
왕이 되어서도 붕당정치의 폐단 극복이라는 과제 앞에,
그의 깊은 고민을 덜어 줄 수 있었던 것은,
그저 한모금의 담배연기가 전부였었다.
깊은 밤 홀로 앉아 담배를 피우며,
나라를 위한 생각과 시름에 잠긴 정조 임금의 쓸쓸한 모습을 상상해 본다.
노론 등과의 대립에서 생긴 스트레스를 담배로 풀었다는 것.
술은 멀리했지만,
한번 마시면 폭음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불취무귀(不醉無歸)
같이 술을 마신 신하에게 대취하지 않았으면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또 음식이 남으면 싸서 신하들에게 줄 만큼 자상한 임금이기도 했습니다.
정조는 그의 효에 관한 생각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의 어버이를 미워하지 않으며,
자기 어버이를 공경하는 사람은 감히 남의 어버이를 업신여기지 않는 법이다.”
정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갈등,
그리고 어머니 집안과 아버지의 갈등 등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담배를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정조는 골초라고 할 만큼 담배를 즐겨 했을까?
정조는 어렸을때부터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에다,
할아버지인 영조의 호령에 놀라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지냈고,
심지어 끊임없이 목숨을 노리는 무리들 때문에
임금자리에 오를 때까지 사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왕이 되고서도 과감한 개혁으로 탕평책을 쓰고,
많은 정책들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노심초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복잡한 생각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자
담배를 가까이한 것으로 짐작된다.
정조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권6"
담배의 별칭인 ‘남령초’에 대한 예찬.
나는 어릴 적부터 다른 기호품은 없었으나,
오직 책 읽는 것을 좋아하였으니,
연구하고 탐닉하느라 마음과 몸에 피로가 쌓인 지 수십 년에
책속에서 생긴 병이 마침내 가슴속에 항시 막혀 있어서,
혹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즉위한 이래로는 책을 읽던 버릇이 일체 정무로까지 옮겨져서,
그 증세가 더욱 심해졌으므로 복용한 빈랑나무 열매와,
쥐눈이 콩만도 근이나 포대로 계산하여야 할 정도였고,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보았지만 오직 이 남령초에서만 힘을 얻게 되었다.
화기(火氣)로 한담(寒痰)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장을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안온하게 잘 수 있었다.
정치의 득과 실을 깊이 생각할 때에 뒤엉켜서 요란한 마음을,
맑은 거울로 비추어 요령을 잡게 하는 것도 그 힘이며,
갑이냐 을이냐를 교정하여 추고(推敲)할 때에 생각을 짜내느라
고심하는 번뇌를 공평하게 저울질하게 하는 것도 그 힘이다.
--정조의 담배 예찬론 입니다. --
"일득론" 이라는 문헌에 담배예찬론을 남겼을 정도다.
내용을 보면 담배는 맛이 "제호탕" 보다 좋고,
향기는 난초나 지초보다 뛰어나다고 하였고,
유익한 점이 많으니
더위를 씻어주고,
추위를 막아주며,
식사뒤에는 음식을 소화시키고,
변을 볼 때는 악취를 쫓고,
잠이 오지 않을때 피우면 잠이 오게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글을 쓸때나,
남과 대화할때나,
사색할때나, 도움이 되지 않을때가 없다고 하였다.
중국사람은 남령초라고 부르고,
동방 사람은 남초라고 부르며,
민인(지금의 중국 푸젠성 주변에 살던 야만인)은 연엽이라고 부른다.
또한 박물가들은 연다라고 하기도 하고,
연초라고 하기도 하는데 어느것으로 정확한 명칭을 삼아야 할까?
당초에는 이 풀의 설질이 술을 깨게 하고 기분을 안정시킨다고 하여,
죽통에 넣고 불을 붙여 연기를 흡입하여 보았는데,
매우 신기한 효험이 있었으나,
독이 있을까 염려되어 감히 가벼이 시험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후에 그 효능을 알아낸 자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간장을 억제하고 비위를 도우며 마비증세를 없애고 습담을 제거하니,
사람에게 유익함은 있어도 실제로 독은 없다고 하였다.
점차 세상에 성행하게 되고,
심지어는 말 한 필과 남초 한 근을 바꾸기도 하며,
지금에 와서는 곳곳에 재배하고,
사람마다 효험을 보고 있는 데 금지하자는 것이 무슨 말인가?
쓰임에 유용하고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말하자면 차나 술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南靈草(남령초- 남쪽에서 온 신령스런 힘을 가진 풀)
담배가 전래 되었던 초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피웠을까?
당시에는 담배가 거의 밀수품이었고 엄청나게 비쌌다고 하는데,
무게로 쳐서 은과 같은 값이었다고 한다.
또한 외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노잣돈 대신 담배를 갖고 갔다고 한다.
그렇기때문에 상류층인 사대부들의 기호품이 되었고,
양반댁마님들의 나들이 행차에 반드시 담뱃대와 담배 쌈지를 든 하녀가 뒤따랐다고 한다.
담배 재배가 늘어나면서 청나라로 수출도 했는데,
병자호란때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 오는 데 담배가 한몫을 했다고 한다.
결국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담배를 피우게 되었는데,
궁중에서도 궁녀들이 소일거리로 피우는 것을 인정할 정도로 널리 애용 되었다.
실제로 담배는 음양으로 볼때 순전히 "양"의 성질로서 잘 유통되어,
두루 퍼지므로 입에 들어가면 잠깐 사이에 온 몸을 순환하여 쾌통시켜 준다.
한의서에 보면 담배의 약효를 "행기행경락통달삼초"라 하였는데
삼초는 "오장육부"중에 육부의 하나로서 기를 소총시키는 역할을 한다.
삼초는 자율신경계와 유사하므로 서양의학에서,
담배가 자율신경계에 작용하여 진정, 각성 효과가 있다는 것과 일치한다.
즉 긴장을 풀고 쾌감을 주며 정신집중에도 도움을 주는 등
정신적인 피로를 풀어줄수 있으므로 술이나 차 대용으로 쓰인다.
담배는 서양에서 처음에는 약초로 재배 되었다.
종기나 상처를 담뱃잎으로 싸서 치료 하였고,
프랑스의 카트린느 왕후는 담뱃가루를 두통약으로 애용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담배가 만병 통치약으로 간주되기도 하였으며,
어린학생들에게 급식하듯이 담배를 나누어 주기도 했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남령초 라는 이름으로 불렷듯이 뭔가 신령스러운 힘을 가진 풀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아이들이 횟배(회충때문에 배가 아픈 충복통) 않을때 피우게 하였고,
소화제로서 음식을 먹고 체한 경우에도 효과가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담배가 일시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지속적으로 많이 피우다면 엄청난 장애를 야기 한다는데 있다.
담배연기에는 니코틴,일산화탄소등의 유독성분을 포함하여 수많은 유해 화학물질과
발암물질이 들어 있기에 흠연으로 인해 수명이 단축된다는 보고가 있다.
담배가 유발하는 질병도 많을 뿐더러,
뇌로가는 혈류량을 줄여 뇌기능을 저하 시키고, 성기능 감퇴를 가져온다.
정조 임금은 지나친 독서로 인한 안질로 고생했고,
종기가 온몸에 번져 피고름을 짜내다 49세에 승하 하였다.
담배를 즐겼던 정조 임금이 일찍 담배를 끊었더라면 더 오래 살아,
조선이 강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료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탕평책과 탕평채 (0) | 2015.10.02 |
---|---|
정순왕후(貞純王后) (0) | 2015.10.02 |
이산은 당뇨병 탓에 세상을 떠났다. (0) | 2015.09.29 |
조선왕들의 독살설 (0) | 2015.09.29 |
올림푸스 12신 (0) | 2015.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