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흥선대원군 리하응(李昰應)의 최후에 관한 기록 ]
광무 무술(戊戌) 2년(서기 1898년)
주상(고종)이 대유재에서 발상(發喪)하고
신기선(申箕善)이 전헌(奠獻)을 대신 행하게 했고
의복 제도를 정해 상복은
장기(상중인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1년 간 입는 옷)를 하지 않고
호상(護喪) 의절(儀節)은 부대부인(府大夫人)과
합해 례장청(禮葬廳)에서 행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98년 2월 2일 79세를 끝으로
운현궁 사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임종에 앞서 장남 재면에게
"주상을 보았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라고 했으나
재면은 자신이 을미사변에 개입된 처지라 감히
고종에게 연락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대원군은 마지막 순간에
"아직도 주상이 거동하지 않으셨느냐?" 고
묻고는 긴 한숨을 내쉬며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을미사변에 개입된 것에 대해
심한 자책감에 시달려 온 대원군은 마지막 순간에
고종에게 빌고 싶었는 지도 모릅니다.
한 때는 강력한 쇄국정치를 하면서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노력했던 최고 권력자의 최후치고는 너무 초라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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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새벽(명성황후)
1895 10.8 <음력 8월 20일>
갑오개혁을 한지 1년이 지나고 청국과 왜국이 전쟁을 일으켜
왜인들이 승리했던 그때의 상황....
간악한 왜인들은 세계사 와 고금에 없는일을 계획하여 실행에 옮긴다.
일명 "여우사냥" 이것은 당시의 암호였다...
정식명칭은 지금도 왜국 외무성 특수자료실에 "조선왕비사건"
이라는 명칭으로 공문서류가 남아있다....
1. 강화도 병자수호조규 <불평등조약> 을 맺은후 부터 두나라를
왔다 갔다했던 이노우에 가오루 와 오카모토 류노스케 <육군소속>
이노우에 가오루 가 당시 조선주재 일본공사를 퇴임한 후
15일간을 더머물다 왜국으로 돌아간 3개월후 새로부임했던
왜국공사 미우라 고로우 에 의해 엄청난 비극이 시작 됐다..
이 사건엔 단지 미우라 고로우만 포함된것이 아니다...
물론 시해직후에 왜국은 조선왕비 시해사건과는
본정부는 상관이 없다했지만 사실은 그렇지않았다...
왜냐하면 1895 11.23 히로시마 재판소의 재판결과와
국모시해직후 돌아온 군인들과 낭인들에게
명치일왕이 한행동이 그것을말해준다...
이른바 그들을 우국충정지사로 세우고 훈장을 수여했다.
이것은 무얼의미 하는가???
바로 조선왕조의 국모시해사건에
명치일왕 과 이토히로부미도 가담 했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다...
그럼 시해사건의 계획전말은 어떻게 된것인가..
그것은 외무성 특수자료실 안건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노우에 가오루와 미우라 고로우 에 밀담내용이다..
미우라: 그렇다면 방법은 어떤것이 있겠는가? 오직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는 것 밖에 없다.
이노우에: 이일은 계획이 필요하다.서두르면 안된다...
그리고 10.8 일 오전 2시...
일본군 약 150명 과 일본낭인 으로 불리는
부량아 56 명 등을 합치면 약 207명이 된다...
일본은 명분이 필요했다...
이사건을 조선군에게 떠맡기려면 그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훈련대 40여명을 세워놓고 들러리를 서게했다
그리고 당시 대장 우범선은 철처히 속아 이일을 맡는다...
또한사람 연대장이었던 홍계훈은 장렬히 전사한다..
2시에 갔던곳은 공덕리 흥선헌의대원왕의 별장으로가서
대원군을 강제로 끌고오고 경복궁을 강제점령한후
당시 왕태자전하와 대군주폐하 <고종 순종>
황제폐하를 강제로 연금시키고 건청궁 옥호루의 모든문을 포위하고
명성황후를 비롯한 그곳의 궁인모두를 시해/살해했다...
공덕리를 갔던 시간을 제외 궁궐에 침입한뒤
시해를 한 시간은 단 45분만에 일이었다.
명성황후폐하와 고종황제폐하께서는
새벽까지 주무시지않았다한다..
당시 후원에 계시던 두분은 말씀을 나누고 계셨는데
명성황후께서 유언아닌 유언의 말씀은 이러했다.
대군주 폐하 부디 종묘사직의 중함을 잊지마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얼마안있다 왜인들에게 시해당하고 말았다...
거의 포로나 마찬가지로 잡혀있던 조선 훈련대 군인까지합한다면
240명이 넘는다....
슬프고 통곡할일이 아닐수 없다....
너무나 슬픈일입니다 국모시해사건은 정말 비통함을
말로 형용할수 없습니다...
명성황후는 평소에 사진찍는걸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어의로 활동한 언더우드 여사에 따르면 생전에
명성황후는 정적에게 노츨되는걸 꺼려 했으며 사진을 찍으면
혼이 빠져 나간다고 생각해 사진촬영을 꺼려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아 있는 사진이 확실한지는 모른다
아마도 그녀를 시해한후
일본이 증거를 완전히 없애기 위한 수단이 아니였을까...
일본은 우리의 국모 육영수 여사 저격때도 그들은 재일한국인의
범행으로 전혀 법률상 도덕적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명성황후는 을미사변때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시해당하는데 그때의 나이는
여자로서의 한창인 나이인 44세였고 나이보담 은 훨씬 젊어보였다고 한다
40대로 보이지 않는 젊음은 유해 확인 과정에서 상당히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얼굴은 젊었으나 다시 젖가슴을 살펴보니 나이든 사람이었다"
살아서는 외국 사신에게 얼굴조차도 보이지 않았던
명성황후가 죽은 후에는 이국의 사내들에게 이와같은 취급을 당했던 것이다
불과 1백년전 러시아, 청, 일본등 여러 외국을
혀끝으로 농락한 정치적 여성
그리고 구중 궁궐에서 반역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탁월한 총명성과 유연성을 발휘하여 수없는 위기를 모면했고......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맞서 남편 고종과 아들 순종을
앞세워 자신의 권력을 옹호했다
권력을 위해선 부모 자식간도 죽이고 죽여야하는 하는
그때의 상황이 안타깝고 이해할 수 없지만 격변하는
한시대를 풍미한 한 여걸에 대해 요즘 많은 관심이 가는건 확실하다
이마도 그녀는 대원군의 급변하는 외국의 실정에 어두워
쇄국정책을 고집한 것에 비하면
다각적으로 변모하는 주위의 세상에 일찍이 눈뜸으로,
어쩌면 여성의 해방을 허용하는 유럽의 풍속을 갈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내 나름대로의 해석까지도 해보면서...
일본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명성황후 살해 사건을 모르고 지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두 나라의 우호 증진을 외쳐대면서
또 한쪽에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역사 왜곡….
그래서 일본은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숙명의 이웃나라인지도 모른다.
명성황후가 일본군에게. 7조각으로 잘려 사진과함꼐
불태워진것이 너무도 불쌍하고. 분통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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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궁 엄씨(嚴氏)에 관한 기록 ]
고종 을미(乙未) 32년(서기 1895년)
전에 상궁(尙宮)이던 엄씨(嚴氏)를 불러 입궐시켰다.
왕후(명성황후)가 있을 때 주상(고종)이
두려워 감히 사사로이 곁눈질하지 못했다.
십 년 전에 우연히 엄씨를 주상이 사랑해
왕후가 크게 성내 죽이려 해
주상은 간절히 애걸해 면했지만 밖으로 내보냈다.
이에 이르러 불러 들어와 변(을미사변)이 난 후 비로소 5일째라
주상의 일편단심이 없어 도성 백성들은 다 한스러이 여겼다.
엄씨는 모양이 민(閔)왕후와 닮아 권모술수와 재략 역시 같았다.
이미 입궐해 대전의 은총을 오로지 해 정사에 간여하고
뇌물을 들여 일의 진행은 민 왕후 때랑 같았다.-<梅泉野錄> 고종 32년 -
[상궁 장씨(張氏)의 최후에 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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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純宗)은 이미 양도(陽道=생식기능)가 못 펴서
인해 고질이 돼 명성황후가 후사(後嗣)를 이을 수 없음을 탄식해
왕자 리강(李堈)의 득남(得男)을 헤아리고 기다려
세자의 대통(代通)을 이으려 했다.
고로 리강은 점점 박대(薄待)치 않게 보여
완화군(完和君)을 대하던 것과 많이 달랐다.
신묘(辛卯, 고종 28년)년 겨울에 이르러 주상(고종)에게
리강을 의화군(義和君)으로 봉함을 권했다.
의화군 리강은 상궁(尙宮) 장씨(張氏)에게서 났다.
리강이 태어나니 명성황후는 성내어 날카로운 칼을 짚고
장씨 처소에 이르러 창에 칼 꽂고 외치며 왈, "칼 받아라!" 했다.
장씨는 본래 힘이 세어 곧 한 손으로 칼자루 쥐고 한 손으로
창을 밀치며 나가 굽히고 엎드려 목숨을 애걸했다.
모발은 흩어져 구름처럼 드리워졌고 얼굴은 가려졌다.
(황후는) 불쌍히 생각해 칼을 던지고 웃으며 왈,
"마땅히 대전의 사랑을 받아 지금 죽이기 불가하다.
그러나 궁중에 거처하지는 못한다." 하며
장사를 불러 결박하고 음부(陰部)
두 쪽 살을 도려내 밖으로 내쫓았다.
장씨는 그 형제들에게 의지해
10여 년을 살다 상처로 고생하다 죽었다.
- <梅泉野錄> 甲午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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