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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월광화 2012. 11. 27. 14:08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나라의 귀한 존재로 태어나 가장 낮은 삶을 살았다던

그녀의 일생을 들여다 본다는 설레임이 있었다.

하지만,소설 '덕혜옹주'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한 여인의 모질었던

삶의 무게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그녀 조차 우리가 품어야 했던 한 역사이거늘

이토록 무심하게 잊혀져 있었다는 현실이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했다.

 

고종이 환갑 때인 1912년 낳은 덕혜옹주는 열세 살에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난 뒤,

열아홉 살이던 1931년 쓰시마의 소 다케유키(宗 武志) 백작과 정략결혼했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따랐던 오빠 순종과 어머니 양귀인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신경쇠약 증세를 보여 결혼 1년 전 이미 조발성 치매 진단까지 받은 상태였다.

덕혜옹주는 1932년 딸을 출산한 직후 오랫동안 정신병원 신세를 졌고,

1955년 이혼당했다.

1962년 귀국한 덕혜옹주는 창덕궁에서 머물다 1989년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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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빼앗기고 다시 찾은 후에도 우리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야했다.

하지만 적어도 빼앗긴 것은 찾아왔어야 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왕정복고가 두려워 일본으로 끌려갔던 '왕족'의 존재를

무시했다는 것이 실로 충격적이였다.

권력을 놓치기 싫어 나라의 뿌리조차 거부한 것은 아닌지...

역시 역사는 승자의 편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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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의 아들인 이석씨가 공개한 고종황제의 왕실가족사진.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 영친왕, 고종,

순종의 왕후인 순정효왕후 윤씨, 의왕의 왕비 덕인당 김씨,

의친왕의 아들인 이건,

고종 옆에 앉아 있는 여자 아기가 바로 덕혜옹주다.

 

옹주? 그래,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에 우리는 '왕'을 섬기는 나라였다.

어떤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한

'이씨 왕조'라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결과가 어떻든 모든 것이 우리가 알고 품어야할 역사가 아니던가...

한편으론 그런 비아냥의 생각 조차도

일본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낮추도록 뿌리깊게 심어놓은

'망국 국민' 교육에 대한 잔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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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혜옹주의 돌사진 -

이렇듯, 어여쁘고 존귀한 존재로 태어난 옹주였다.

똘망똘망하니 눈빛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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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혜옹주의 생모인 복녕당 양귀인

 

소주방 나인이였던 덕혜옹주의 생모인

복녕당 양귀인의얼굴에는 기품과 우아함이 흘러넘친다

양귀인은 일본으로 끌려간 딸에 대한 그리움이 병이 되었는지

유방암으로 4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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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원 시절의 덕혜 옹주 -

 

조선의 황녀 그녀에겐 세가지 죄목이 있었다.

첫째는 지나치게 영민한 것이고
둘째는 품어서는 안될 그리움을 품은 것이고
세째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 딸로 태어난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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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유학을 떠나기 전의 덕혜옹주

꼭 다물어진 입술에서 옹주의 기품과 결의가 느껴진다.

일본으로 떠난 이후 펼쳐질 자신의 기막힌 인생을 상상조차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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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 유독 하얀 피부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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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너무도 싫어했던 '기모노' 차림의 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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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가 일본에 의해 강제 결혼을 한 소 다케유키 백작

 

사진 속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둔

다케유키 또한 자신도 희생양임을 강조하는 듯한다.

소설 속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이해하고

남편으로써 그녀를 품으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덕혜옹주는 일본인인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살 수 없었기에

그의 사랑을 받아 들일수도 없었고,

현실을 인정할 수도 없었다.

 

평범한 여인네였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텐데

조국에 대한 그리움,

타케유키에 대한 반항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미약하게나마 일본에 저항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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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德惠)는 강제로 퇴위 되고 나라를 빼앗긴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황제인 고종이 환갑을 맞은 1912년 5월25일 낳은 딸이다.

어머니는 궁녀 출신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어머니가 정실이 아닌 까닭에,

그리고 비록 나라는 망했지만 왕의 딸이라 해서 옹주(翁主)라는 호칭이 붙었다.

 

허나, 모두의 기억 속에 사라진 후에 38년만에 나타난 덕혜옹주는

정신도 온전하지 못한 병약한 노인이였다.

 

오랜 정신병원 생활에서 그녀가 얻은 것은 무엇이였을까?

자신을 잊어버린 조국에 대한 원망은 없었을까?

그럼에도 그녀는 대한민국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 덕혜옹주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이 올해 그가 태어난 지 100년,

일본에서 귀국한 지 50년이 되는 해임을 기념해 11일부터 특별전을 연다.

그를 통해 대한제국과 조선왕실 여성의 복식·생활사를 보여주기 위한 전시회다.

박물관은 내년 1월27일까지 이곳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하는 이번 특별전

주인공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고 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덕혜는

대한제국이 이미 망하고 난 뒤에 태어났으므로 황녀는 아니다.

덕혜는 14세 때인 1925년 일본유학을 떠나 20세에 쓰시마 종가(宗家)의

소 다케유키(宗武志. 1908-1985)라는 사람과 정략결혼을 했다.

하지만 이후 정신병을 앓는 등의 삶을 살다가 1962년 고국으로 돌아와 후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의 수강재(壽康齋)라는 곳에서 머물다

78세를 일기로 1989년 사망했다.


박물관은 이번 전시에서 "덕혜의 일생과 당시

대한제국 황실의 생활을 조명해 볼 수 있는 그의 복식과 장신구,혼수품 등

유품과 관련 기록물을 공개한다"면서 "이 중 복식과 장신구,

혼수품 등은 도쿄에 소재한 일본 문화학원복식박물관(文化學園服飾博物館)과

후쿠오카(福岡) 소재 규슈국립박물관 소장품으로 국내는 첫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품 중 복식은 조선시대 여성 복식 일종인 당의(唐衣)를 비롯해

덕혜가 10세 이전에 입은 유아복과 소녀 시절 옷가지가 대부분이다.

이번 특별전 전시품 상당수를 차지하는 복식박물관 소장품은

덕혜와 이혼한 소 다케유키가 조선왕실에서 보낸 다른 혼례품과 함께

영친왕(英親王) 부부에게 1955년 돌려보낸 것이다.

 

이들 자료는 당시 일본 문화학원 전신인 문화여자단기대학 학장

도쿠가와 요시치카(德川義親.1886-1976)에게 기증되면서

현재까지 도쿄에 남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하나인 연두색 당의는 크기로 보아 12-14세용으로 짐작된다.

13세 때인 1925년에 찍었다고 하는 사진에서

덕혜는 이와 흡사한 옷을 착용한 모습이다.

가슴과 양쪽 어깨, 등에다가 발가락이 다섯인 용을

입체감 있게 수놓은 오조룡보(五爪龍補)를 부착했다.

규슈박물관 전시품에는 조선왕실에서 소 다케유키 본가인

쓰시마의 종가에 보낸 혼수품이 포함된다.

은으로 만든 찻잔 등의 소규모 금속공예품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자료는 일본인 소장가가 구입해 보관하다가 박물관에 기증한 것들이다.

이 중에 뒤주와 솥을 축소해 은으로 만든 장식품을 보면

아래에는 '순은(純銀)'과 '미(美)'라는 글자를 새겼다.

'미(美)'는 이왕직미술품제작소의 마크로,

이를 담은 상자 뚜껑에도

'경성이왕가미술공장조(京城李王家美術工場造)'라는

문구를 인쇄된 표기가 붙어 있다고 박물관은 말했다.


고국서 가져간 혼수품 보며 덕혜는 얼마나 울었을까

 

 

사라진 제국의 딸 덕혜옹주

 

덕혜옹주 소녀시절 당의차림

 

 

덕혜옹주의 어린시절 색동저고리

 

 

 

 

  

 

덕혜옹주의 일생

1912년 5월 25일 덕수궁에서 태어남

1917년 6월 정식으로 왕공족(王公族)에 등록

1921년 4월 일출심상소학교 입학

5월 덕혜(德惠)라는 호를 받음

1925년 3월 일본으로 강제 유학. 도쿄 여자학습원 중등과 2학년 입학

1930년 9월 '조발성치매증' 진단을 받음

1931년 3월 여자학습원 졸업

5월 8일 소 다케유키와 결혼

1932년 8월 외동딸 마사에 출산

1950년 1월 언론인 김을한이 정신병원에 입원중인 덕혜옹주를 찾아감

1955년 6월 소 다케유키와 이혼

1962년 1월 26일 특별기편으로 귀국. 서울대병원 입원

1967년 퇴원.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김

1989년 4월 21일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