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가계도 : 고종(1852 - 1919) - (2005년도 자료임)
고종 ----
명성황후 민씨 ---- 순종
귀비 엄씨 ---- 영친왕[이은]
귀인 이씨 ---- 완왕(병사함)
귀인 장씨 ---- 의친왕[이강]
소의 이씨
귀인 정씨 ---- 우
귀인 양씨 ---- 덕혜옹주
= 고종은 완왕을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잃은 자식이 많으며,
황태자인 순종, 의친왕 이강, 영친왕 이은, 늙은 나이에 얻은 덕혜옹주가 있었습니다.
1.고종 [광무황제]
2.명성황후 민씨 [명성태황후]
3.귀비 엄씨 [엄황귀비]
영친왕 이은의 생모로 똑똑했던 인물로 알려진다.
고종의 상궁으로 명성황후 시해후 고종의 총애를 받아 영친왕을 생산했으며,
거의 왕비로써의 역할 을 수행하였으나 출신상의 문제로 왕실에서 천대받았다.
고종의 재가를 얻어 숙명, 진명, 양정학교를 세우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아들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자 애를 태우다가 결국 1911년 장티푸스로 별세하였다.
4.덕혜옹주
고종과 상궁 양씨에 태어난 고종의 고명딸. 1912년 출생.
13세때 볼모로 일본에 끌려간 뒤 외로움과 향수병으로 정신질환에 걸림.
19세때 일본인 소다케시 백작과 강제 결혼. 그러나 결혼의 충격으로 병이 악화돼
이혼당하고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다가 1952년 38년 만에 귀국.
귀국후에도 백치로 낙선재에서 생활하다 1989년 3월 별세했다.
◇◆ 순종의 가계도 : 순종(1874 - 1926)
순종 -----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
순종은 자식이 없었고, 첫째 왕비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어린나이에 돌아가셨고,
순정효황후 윤씨는 1966년까지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했다.
◇◆ 영친왕의 가계도 : 영친왕(1897 - 1970)
영친왕 ----
영친왕비 방자(마사코) ---- 진(유아때 사망)과 구
원래 민갑완이라는 약혼녀가 있었으나 영친왕은 일본의 조선왕족 결혼법 제정에 의해
강제로 일본왕족과 결혼하였다. 일본이 제정한 조선왕족결혼법은 다음과 같은데
"조선왕족은 선일융화를 위해 무조건 일본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영친왕 이은 [의민황태자 영친왕]
2.이방자 여사 [영친왕비]
3.민갑완 [영친왕의 약혼자]
4.진왕자 (유아시기 사망)
영친왕과 영친왕비 방자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유아시기에 사망했다.
조선방문시 사망하였으며, 검은 물체를 계속 토해낸 것으로 보아 독살일 것으로 추정된다.
5.故구왕자 [황세손 구]
현존하는 유일한 영친왕의 자식이자 현재 조선왕실의 최고 직계 황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구는 영친왕이 이왕직(조선국왕)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왕세자로 일컬어졌다.
사춘기에 불행한 부모의 운명과 혼혈왕자인 자신의 처지를 알고 충격을 받았으며,
결국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겠다고 17세에 미국으로 떠나 MIT 공과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그러다가 미국 여인 줄리아를 사랑하여 결혼하였다.
1963년 32세때 부모를 따라 조국에 왔고 한때 서울대 공대 및 연세대 공대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직계 황손으로써 의무를 강요하는 종친회와의 갈등과 '신한공항'등의 사업실패의 좌절,
단지 왕손이라는 이유로 이용하려는 주변의 시각들에 의해 1979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1982년에는 종친회의 강요 및 이구씨의 개인사정에 의해 줄리아랑 이혼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여인 아리다랑 동거하면서, 도쿄에서 살면서 사업활동을 하였다.
84년 사기혐의로 고소, 89년 어머니 이방자 여사의 사망등의 파란을 겪기도 했다.
이방자여사가 타계한 뒤 수차례에 걸친 종친회의 귀국 종용을 거부하던
이씨는 환갑을 넘기면서 심경 변화를 보여, 귀국을 결심했고,
결국 96년 귀국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종친회장자리를 이구씨에게 기증하였고,
부영주택 이중근 회장이 마련해준 장충동 호텔 영빈관에서 생활하며,
왕실제사인 종묘대제등의 초헌관 참여, 종친회 사무를 보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6.줄리아
이구의 전 아내. 미국에서 고생하는 동안 외로운 동양 청년 이구와 사랑으로 결혼.
실내장식가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으나 외국인에다가 후손이 없다는 이유로
이혼하라는 종친회와 큰 갈등을 가졌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실내장식품을 만들어
시어머니였던 방자여사의 사업을 돕고 왕실의 일원으로 열심히 활동하였다.
시어머니였던 이방자여사는 줄리아에 대해 외국인만 아니었다면
최고의 왕실며느리 감이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종친회의 갈등 및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던
이구씨와의 관계악화에 의해 1982년 이혼했다.
줄리아숍을 운영하다 결국 생활고에 의해 1995년 하와이로 떠났다가
2000년 남편의 사진 450점을 돌려주기 위해 다시 한국에 방문하였는데,
그리운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한채,
줄리아가 왕세자비시절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시아버지 영친왕의 묘소를 방문한후
왕실의 30여년간 삶을 회고하는 편지를 남겼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 되면서
"줄리아의 마지막 편지"라는 특집방송이 방영되기도 하였다.
◇◆ 의친왕의 가계도 : 의친왕(1877 - 1955)
의친왕의 가족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약 20?여명이 넘는 자녀분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의친왕 이강
2.이건
의친왕의 장남으로 궁인 정씨의 소생이다.
1918년생.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가서 일본왕족 딸과 강제 결혼하였다.
해방 후 이혼하고 일본인으로 귀화.
현재 재혼한 일본 부인과 일본에 살다가 현재는 별세했다.
3.이우
의친왕의 차남으로 궁인 김씨의 소생이다.
1911년생. 12세에 일본에 볼모로 가서 군인으로 복무중
1945년 8월 히로시마의 원폭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비운의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진다.
똑똑하고 인물이 좋아 의친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조선 말기 왕족중 거의 유일하게 오랜기간 일본의 강압결혼에 저항하여
결국 한국여성인 박찬주씨와 결혼하였고 청과 종이라는 자식을 두었다.
이종씨는 현재 사망했고 이청씨는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다.
4. 이수길
이우의 동생. 1918년생. 민주당 장면 내각때 문화재관리국장을 지내며,
영친왕을 귀국 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칠궁에서 살다가 전두환 대통령 당시 청와대 경호실의
강제 축출 강요에 충격 받고 1982년 65세로 별세.
부인 김신덕 여사는 칠궁에서 쫓겨나 서울 개포동의 19평 시영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딸인 이순씨는 인천 아들인 이한주씨는 일본에 살고 있다.
5. 이석
본명은 이해석으로 홍씨 소생.
1941년 생으로 관훈동 사동궁에서 의친왕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잠시간의 행복한 생활이 있었지만 6.25전쟁으로 왕실은 재산의 대부분을 잃고,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국고로 환수당한 뒤 가족들은 심한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특히 1959년 아버지 의친왕이 사망하자 그는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위해
종로 2가 음악다방에서 DJ일을 시작했고,
1962년부터는 미8군에서 한달에 3만원을 받으며 노래도 불렀다.
그러나 왕실어른들과 문중 어른들에게 노여움을 샀고 그는 경제력 무능력한
왕족의 신분에 대해 눈물로 왕실어른들께 호소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64년 사회각층의 인사와 만나는 TV프로그램"굿이브닝쇼"의 사회를 보게되자
결국 윤대비는 화를 풀었다고 전해진다.
가수 이석은 '비둘기집''두 마음''외로운 조약돌'등의 노래를 부르며,
한때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64년 여러 주변상황에 의해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다.
제대후 암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 홍씨를 잃고, 어려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미국 한인회장인 김병묵박사의 도움으로 79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부의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고,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육체노동을 하는 등 고생을 하다가 87년 드디어 미국의 영주권을 얻었다.
그러나 89년 이방자여사의 장례 직후 다시 조국인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결의가 생겼고,
결국 귀국한후 잠시간 가수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흩어진 왕실을 다시 모우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그가 만난 세 명의 부인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고,
이석씨는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음반을 준비하면서, '황실보존국민연합회' 총재로써,
황실 문화 복원 작업 등의 활동을 하고 추진중이다.
6. 이해경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의친왕과 김금덕여사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1950년대 몰락하는 왕가가 싫어 미국으로 도미했다.
1969년 컬럼비아대 동아시아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의친왕 이강의 독립운동사실을 알아냈고,
의친왕의 명예를 살리기 위해 복권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한국 방문때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강연을 주체한 적도 있으며, 왕실의 유품등을 기증하였다.
◇◆ 덕혜옹주 남편 소 다케유키(宗武志, 1908년 2월 16일 – 1985년 4월 22일)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의 남편으로, 일본의 옛 화족이다.
대마도 번주 집안인 소 가문의 37대 당주로,
임진왜란때 조선을 침략한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자
부장인 소 요시토시의 직계 후손이며 작위는 백작이었다.
영어학자이자 시인이며 화가로서 말년에는 레이타쿠 대학(麗澤大学)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흔히 '宗武志'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종무지' 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제 다케유키는 나이 50줄에 아무것도 안 남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인생을 거의 다 헛되이 보낸 것이지요.
그나마 그는 그 나이에 재혼을 해서 2남 1녀를 봤고 30년을 더 살았으니,
1972년에 내한 덕혜공주 만나려 했으나 실패.
1955년 이혼한 데 이어 1962년 1월26일에는 하네다공항에서
특별기편으로 고국으로 돌아간 옛 아내 덕혜를 그리는 다음과 같은 시가 나왔다.
“그리는 아내여, 해궁(海宮) 회랑에도 바닷물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
많은 새가 무리지어 날개치는가? / 당신은 외딴집 붉은 서까래에 /
내가 준 하얀 진주를 걸어 놓고는 홀로 한숨짓고 있는가? / 그리운 아내여,
이젠 오갈 길조차 끊어져 / 사랑하는 아이를 나는 그저 안고 내내 서 있을 뿐이라오.”
◇◆ 관련사진
(덕혜옹주 부부 사진. 한때 행복했다?)
(대마도에 있는 덕혜옹주 봉축결혼기념비. 당시에 대마도에 있는 한국인들이 건립했다가
두 분이 이혼하자 파기했는데, 한국관광객이 넘쳐나자 2000년에 다시 재건했다.)
(덕혜옹주의 어린 시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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