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
조선 왕조에서 임금의 자리는 언제나 '독살' 을 경계해야 하는 위치였다.
왕권과 신권이 치열한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던 조선 왕조에서 택군의 정치,
재상정치를 강조했던 신권과 절대 왕권의 이상향을 강조했던 왕권은,
본질적으로 어울릴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임금은 언제나 신하를 경계해야 하고 신하는 맘에 안드는
임금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명분을 만들어야만 했다.
이 와중에 임금을 제거하기 위한 독살시도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당파의 이해에 따라, 혹은 왕권의 계승순위에 따라 독살을 통한 자연스러운
정권교체야말로 조선 왕조 특유의 정치 행위였다.
지금 말할 연산군 그도 바로 그렇게 제거 당했다.
연산군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이다.
연산군은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지 못한 사람이었고, 성장 과정도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의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던 그의 유년시절은 황량하고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계모였던 정현왕후 윤씨는 연산군에게 어진 어머니가 되어주지 못했고,
연산군의 교육을 담당했던 할머니 인수대비 한씨는 매번 엄격함으로 그를 다뤘다.
사랑도, 애정도,
인간에 대한 신뢰도 없었던 그의 성정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만 가득찼다.
친모였던 윤비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윤비를 버렸던 아버지 성종과
윤비를 제거했던 할머니 인수대비에 대한 원망은 날로 커져만 갔다.
연산군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 윤비의 사사 사건은
언젠가 한 번은 열려야 하는 '판도라의 상자' 였던 것이다.
윤비 사사사건에 대한 끝없는 집착 속에서,
사림과 훈구가 동시에 화를 당한 갑자사화가 일어났고,
인수대비가 손자의 행패에 가슴팍을 맞고 쓰러져 화병으로 숨을 거뒀다.
갑자사화 이후에 연산군의 성정은 나날이 거칠어져 갔다.
연산군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요부 장녹수 뿐이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와 술과 가무로 하루를 보내기 일쑤였다.
그러나 조정은 침묵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자신의 반대파를 대부분 제거한 연산군은 짧은 시간이지만
대적할 수 없는 '절대왕권' 을 자랑했다.
사관의 입을 막아버리고, 간언하는 자를 무참히 살육했다.
연산군에게 바른 말을 올리는 것은 곧 죽음의 길임을 알고 있는
조정 대신들은 누구하나 옳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들의 침묵이 오죽 답답했으면,
연산군의 지척에 있던 내관 김처선이 간언하다 팔과 다리가 잘리는 수모를 겪었을까.
그렇게 포악했던 연산군의 정치는 세종-성종으로 이어지던
태평성대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연산군의 치세가 10여년 이상 지속되면서 조선 왕조의 불안 요소들이
봇물이 터지 듯 곪아 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임금과 그것을 묵인했던 신하들이 만들어 낸 합작품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종지부를 찍을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정현왕후의 아드님이었던,
진성대군을 위시한 중종 반정세력이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절대 왕권을 너무 믿었던 탓일까.
연산군은 궁궐을 에워 싼 중종 반정 세력에 뒤통수를 맞고
권좌에서 내려오게 되는 수모를 겪는다.
반정 세력에 대한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한채
유흥에 취한 연산군의 치세는 그렇게 허무한 막을 내린다.
연산군과 그의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귀양길에 올랐고
그의 총비였던 장녹수는 사람들의 돌멩이 세례에 목숨을 거뒀다.
할머니, 사림, 훈구 등 닥치는대로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했던
임금의 말로치고는 너무 비참했다.
1506년 9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비극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중종 반정세력은 전(前) 왕이었던,
그것도 패주인 연산군 일가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
연산군의 제거는 중종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최초의 포석 작업이었다.
허나 한 때 10년 넘게 임금의 자리를 지켰던 인물을 사사할 수는 없었다.
우선 희생양으로 삼은 것은 연산군 일가였다.
1506년 9월 24일 연산군의 아들인 폐세자와 창녕대군, 양평군이 먼저 사사된다.
후일 만약 일어날 일을 우선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
연산군의 핏줄들을 모두 저세상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연산군에게 있어
아들들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만큼 처절한 것이었다.
이 때부터 반정세력의 '연산군 제거 작전' 은 보다 치밀하고 섬세하게 진행된다.
연산군 일가가 일시에 사약을 마시고 죽은지 2개월이 지난 11월 8일에
연산군 역시 병사(病死)했다는 소식이 중종에게 전달된다.
사인은 '학질', 즉 말라리아였다.
연산군이 병에 걸려 눈도 뜨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다가
폐위된지 2개월만에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소 건강은 그리 나쁘지 않았던,
연산이 위리안치 2개월만에 병사했다는 사실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강화도에 갇혀 지옥과 같은 위리안치 생활을 지속했다고 하더라도
2개월만에 말라리아로 숨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중종과 반정세력은 연산의 죽음을 그대로 수용했다.
서둘러 왕자의 예로 연산의 장례를 치뤘고,
그를 역사 속의 한 페이지로 묻어버렸다.
그렇다.
패주 연산의 급작스러운 죽음에는 이복동생 중종의 방관과
반정세력의 독살 시나리오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산이 숨을 거둔 계절은 11월에서 12월 매서운 강추위가 세상을 휩쓸때다.
그런데 그의 사인은 '말라리아' 다.
여름 7~8월에나 등장하는 학질모기가 뜬금없이
겨울에 등장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갔다는 것이다.
게다가 학질의 잠복기간이 짧아도 2~3주는 된다는 것을 볼 때
갑자기 급사한 연산의 죽음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모를 조정 대신들과 중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다.
연산군이 죽어야만,
연산군을 제거해야만 자신들의 정권에 명분을 실을 수 있었던 그들은
연산군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인받았다.
사실 연산군은 말라리아에 걸려 죽은 것이 아니라,
반정세력의 '독살' 에 의해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사실상 사사 당한 것이다.
그렇게 가시덩굴로 휩싸여 있던 강화도 어느 곳에서,
역사 속에서 잊혀져야 했던 임금의 시대는 처참한 종말을 고했다.
연산군은 "입은 화를 불러오는 문이요,
혀는 목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은 어느 곳에서나 편안하다." 라는 말을 했다.
그의 말처럼 중종과 반정공신들은 그의 죽음에 관해 입을 다고 혀를 깊이 감췄다.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편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
연산군의 비극은 끝끝내 역사의 뒷페이지 속으로 사라졌다.
그 이후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연산군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졌다.
하늘과 땅만이 아는,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말이다.
어쩌면 연산군은 지금까지도 무덤 속에서 쓸쓸한 눈물을 흘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일까.
누구보다 절대적인 왕권을 자랑했지만 그 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운명은 처음부터 축복 받지 못한 황폐하고 황량한 인생이었을 뿐이란 생각이 든다.
연산군,1476生~~~1506년 12월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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