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복의 옹정제
옹정제(雍正帝, 강희(康熙) 17년음력(1678-12-13일) ~
옹정(雍正) 13년 음력 (8월23일1735년10월8일)는 청나라의
제5대 황제 (재위 1722년 ~1735년)이자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나라 군대의 산해관 입관(入關) 뒤 중국 대륙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정통 황조로서의
세 번째의 중국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
성 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윤진(胤禛) 묘호는 세종(世宗),시호는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짧은 시호로는 헌황제(憲皇帝)이며,
연호는 옹정(雍正)이다.
또한 만주어로는 후왈리야순 톱 한(Hūwaliyasun Tob Han),
몽골어로는 나이랄트 퇴브 칸(Nairalt Töv Khaan)이라 불리기도 한다.
제4대 황제인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이며 강희제의
후궁 출신인 효공인황후(孝恭仁皇后 烏雅氏)의 소생이다.
말년의 옹정제
아버지처럼 치밀하면서 거기에 성실하기까지 한
성격의 소유자로 이미 황자인 옹친왕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정치적 세력을 모으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8황자 윤사, 9황자 윤당, 10황자 윤아,
14황자 윤제 등과 정치적으로 크게 대결하였다.
1722(강희 61년)에 부황 강희제가 붕어하자
군사들을 동원하여 황궁을 장악,
형제들을 철저히 창춘원에 감금시키고
강희제의 고명대신들인 장정옥,융과다 등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오른다.
이때나이가 45세, 등극나이가 늦은감이있다
13년간의 짧은 치세였으나
그의 정책으로 청나라는 강희제 말기
약간 부실하던 황권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특히 황실의 안정과 강력한 황권을 수립하기 위해
과거 황위를 놓고 다툰 형제들은 죽이거나 감금하는 등
철저히 배제시켜 놓고 대신들과 정사를 의논하였다.
그의 정책으로 국가는 더욱 안정이 되었고
내실 역시 튼튼해졌으며
재정 개혁을 통하여 기강 단속과 재정 정비를 일거에 실행하는
정책을 추진함과 더불어 조세제도 자체에도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군기처를 세우고 황권을 더욱 강화,
재상들의 정치 발언권을 규제하였고
재상들의 정치 참여를 규제한 대신
자신에겐 재상들이 본래 결재하던 문서의 양까지 합하여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문서를 검토,
이에 일일이 답하였고 하급의 지방관이라도 자신에게 상소를 올리면
이 역시 받아주어 주필로 써서 보내주어서 명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재상들과 대신들을 군기대신으로 삼고 같이 정사를 의논하였으나
이미 그들의 권세는 명나라 때의 대신들인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에
비하여 크게 축소되어 있었기에 신권은 크게 위축되었다.
강희제 때 일어난 문자의 옥을 다시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청나라의 정통성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한족을 엄정히 다스렸으며
지방관들에 대한 철저한 감시로 부정부패를 크게 줄였다.
그러나 강희제가 죽은 직후 군사들을 동원하여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한 권력 지향적 독재자라는 평판과
지칠 줄 모르고 늦은 밤까지 정치에 몰두하고
백성들을 생각한 훌륭한 군주라는 평가의 양면에 서있기도 하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제위 61년 기간동안
내치와 외치에 성공하여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었다.
그는 대만의 정씨 세력과 삼번의 난을 제압하여
실질적인 중국통일을 이룩했다.
그 뿐만 아니라, 만주쪽으로 침투해 온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키고 오히려 북쪽으로 영토를 더 확장했다.
또한 티벳과 외몽골을,정벌하여 서북쪽으로 영토를 넓혀
오늘날의 중국이 있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내치에도 신경을 써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여
수천년동안 정체되었던 인구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으며,
세금을 늘리지 않는 것을 정책으로 삼아 백성들의 부담을 감소시켰다.
이 밖에 여려가지 업적으로 쌓아 많은 학자들은 청나라 강희제야 말로
역대 중국 황제들중최고의 황제였다고 추켜 세웠다.
당태종이나 당현종 명 영락제,
원세조 보다도 청강희제가 한수 위라고 평가한 것이다.
이렇게 완벽할 것 같았던 청나라 강희제도 오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후계자 문제였던 것이다.
강희제는 여진족의 전통을 버리고 중국 왕조들의
전통에 따라 황후가 낳은 정실 아들을 2살때
태자로 삼아 후계자 수업을 받게 했다.
항상 자주 원정이나 사냥터로 데리고 가거나
최고의 학자들을 선발하여 이들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배우게 하여
문무를 겸비한 황제로 성장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심지어는 정무에 바쁜 와중에도 손수 그가
태자의 교육에 참가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다.
외몽골 원정 같은 여러 많은 정벌전에 손수 참가했을때
태자를 섭정으로 삼아 통치를 맡기기도 할
만큼 태자에 대한 강희제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렇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다.
이렇게 완벽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태자는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기대만큼 부응하지 못했다.
자질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심적인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결국 태자는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면서
방탕한 생활에 빠졌고,
여러가지악행을 저질렀다. 심지어는 주변 사람을
꼬드켜 쿠테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결국 강희제는 참고 참았던 인내를 버리고 태자를 폐하고
자신의 후계자 문제에 대해 일체 논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는 초강수를 두었다.
태자는 자금성 어느 구석진 궁에 유폐되었다.
그러나 이게 역효과가 났다.
태자는 강희제의 2번째 아들이었는데
강희제의 다른 아들들이 태자 자리를
노리고 권력 다툼을 벌였던 것이다.
맏아들과 8번째 아들, 14번째 아들이 눈에 띌 만큼 세력을 크게
형성하여 권력 싸움을 하면서 많은 신하들이
여러 세력으르 나누어부화 뇌동을 했다.
국정이 혼란해지자,
강희제는 임시조치로 태자를 복원시켰지만
아들들의 후계자 싸움을 갈수록 심해져 효과가 없었고
태자 또한 예전의 방탕한 세월로 돌아가
결국 강희제는 끝모를 수렁에 빠졌다.
강희제는 태자를 폐했고
마침내 밀지를 통해 차기 황제를 정하고
죽을때 공개하는 제도로 후계자문제를 봉합했다.
아들들의 후계자 타툼을 멈출 수는 없었지만,
부황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했기 때문에
나쁜 판단은 아니었고 후에 이 제도는
태자 밀건법이명명되어 청나라 후계자 승계 정통이 되었다.
그럼 강희제가 누굴 자기의 후계자로 삼았을까?
사실 강희제는 4번째 아들과 14번째 아들 사이에서 고민을 하였다.
이 두사람이 그래도 아들들 중에 제일 낫기 때문이다.
4번째 아들이 14번째 아들보다 능력이 뛰어났지만
14번째 아들은자기와 꼭 닮아 문무를 겸비했고
자신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고민 끝에 14번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려고 했지만,
마지막에서 망설였다.
그것은 손자문제였다.
14번째 왕자에게는 똑똑한 아들들이 없었다.
다음 황제자리는 그 아들이 잘 하겠지만,
그 아들에 아들이집권하면 또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의 손자때까지는 청제국이 번창하기를 바랬다.
그것에 비해 4번째 아들은 똑똑하고 영민한 아들 홍력이 있었다.
강희제는 손자 100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손자 홍력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얼굴과 닮았을 뿐만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것 까지 닮았다.
자신의 노년에는 손자 홍력을 교육시키는 맛에 인생의 재미를 느꼈다.
자신이 유일하게 훈육을 한 손자는 홍력밖에 없었다.
결국 강희제는 홍력을 염두에 두고 14번째 아들을 버리고
후계자를 4번째 왕자 윤진으로 정했다.
어차피 4번째 아들 윤진에게는 제대로 된 자식이 없어서
홍력이 결국 후계자가 되기 때문에
4번째 왕자가 황제가 된 다음의
후계자 문제까지는 크게 신경을 안 써도 되었다.
강희제는 62년이라는 오래 제위기간을 보내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까지 강희제가 누굴 후계자로 할까 말이 많았지만,
다들 4번째 왕자에게는 눈이 안 돌아갔다.
14번째 아들이나 8번째 아들 둘중에 한명이 되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강희제가 죽고
유력한 신하 여러명과 아들 일부가 참관하는 자리에서
강희제가 남긴 밀지를 공개되면서
4번째 아들 윤진이 공식 황제가 되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말이 많았다.
4번째 아들 윤진이 황제가 올라(옹정제라 칭함)
13년동안 국정을 다스릴때 옹정제가 강희제를 시해하고
밀지를 조작하여 황제로 올랐다는
소문이 궁궐은 물론이요 민간에 까지 퍼졌다.
심지어는 옹정제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딸을 해녕 진씨의 아들하고 바꿔치기 하여
그 진씨 아들이 바로 홍력이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은
옹정제가 정당하게 황제 자리를 올랐으면
홍력 즉 건륭제도 옹정제의 친자 라는게 맞아서
당시 이런 괴소문들은 단지 괴소문이라고 주장했다.
어째든 옹정제는 황제 자리에 무관했지만,
아들을 잘 둔 덕에 무관했던 황제에 오른 행운을 얻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역대 황제들은 자신의 후계자에만
신경썼지 그 후계에 후계에는 신경을 안 썼지만,
강희제는 손자때까지 눈여겨 봤다는 것이다.
강희제의안목 때문에 그의 사후
청나라는 70-80년동안 계속 전성기가 지속되었다.
신하들을 때려잡던 옹정제가 믿고 신뢰하던 측근들
1. 이친왕 윤상
이친왕은 옹정제의 형제로 총리시무대신이었고 '
옹정제의 많은 신임을 받은 인물입니다.
본래 옹정제는 형제들과 사이가 전혀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옹정제에게 그들은 그저 경쟁자일 뿐이었고
개, 돼지라고 부르면서 멸시하도록 했죠.
그렇지만 이친왕은 자신을 낮추었고, 거기다 일까지 완벽하게 처리해서
옹정제로서는 보기 드물게 몇번이고 칭찬하며 자기 옆에 두었습니다.
윤상은 능력적인 면으로 봐도 대단했는데 옹정제가 즉위한지 3년만에
청나라의 은 보유량을 무려 7배를 증가시켰습니다.
1725년 베이징 근처에서 홍수가 나 무려 100만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는데,
수리 사무대신이 임명된 윤상은 수해 지구로 뛰어가 귀신같이
현황을 파악하고 물길을 일일히 측량하여 그림으로 기록해서,
옹정제에게 여러가지 안을 내어 관개 시절을 깨끗하게 정비했습니다.
이친왕에 대한 옹정제의 신임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친왕 윤상은 옹정제가 처리하기 힘든 복잡하고 피곤한 일을
다 척척 처리했고, 그러면서 내색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옹정제는 그에게 밑에서 들어오는 보고나 사람들을 모두
만날 권리를 주었죠. 즉 명나라로 따지면 아랫사람들의 보고를 받고
황제에게 전달하는 환관 같은 역할이었는데, 이친왕은 환관들같은
병폐를 부리지 않고 옹정제가 바라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었습니다.
너무 무서운 황제에게 함부로 말을 못 올리는 신하들도
이친왕에게는 편하게 속내를 털어놓았고,
이친왕을 통해 들은 그들의 제안을 옹정제는 심사숙고했습니다.
왕권이 엄청나게 강한 강희 - 옹정 시대에 청나라는
관리들이 붕당을 이루는것은 극도로 혐오해서 탄압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친왕을 중심으로 모이는것만은 옹정제도 눈을 감아주었습니다.
이친왕이 병으로 죽자 옹정제는 무려 사흘간이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있었습니다. 장례는 친히 집전했고,
황제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신하가 쓰지 못하는 피휘를 깨고
욘상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가 하면,
그 아들들도 두명이나 왕의 직위를 주면서 대우했습니다.
이친왕은 옹정제에게 있어 신하를 뛰어넘어서,
어쩌면 유일하게 속내까지 털어놓을만한 형제이자 친구였죠.
2. 악이태
악이태는 강희제 시절부터 관직에 있던 인물이지만,
정작 그때는 별 출세와 인연이 없어서 나이만 먹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악이태와 옹정제가 인연을 맺은 계기는 다음과 같았죠.
한참 강희제의 자식들이 차기 황제를 노리며 싸우던 당시,
옹정제 역시 드러나지 않게 움직이며 사람을 모으면서
악이태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익이태는 거절했습니다.
"왕자는 조정의 신하와 교분을 쌓아서는 안되는 법입니다."
황제가 된 옹정은 악이태의 그런 태도를 높이 여기고 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악이태는 현장 출동해서 막 부딫히면서 꼬인 일을 해결해가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큰 관점에서 정치를 볼 줄 알았습니다.
청나라는 자신들을 제외한 소수민족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특히 서남부의 묘족이 행패를 부리는게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악이태는 이 문제를 현지 소수민족에서 뽑은 관리들이 수탈이
너무 심한게 원인이라고 보았고,
이를 바꿔 중앙과 직접적으로 연결하도록 해서 성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책을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갔죠.
또한 옹정에 대한 충성심도 뛰어났습니다.
1727년, 악이태는 새로운 운남의 순무가 된 주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상(옹정제)이 사람을 쓰는 법을 기상천외 하다고들 하지.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라네.
오직 지성을 다하고 황상의 뜻을 철저히 관철하면 중용 될 수 있네.
황상을 기만하지 않으면 큰 과오를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은,
만약 못된 꾀로 속이려 든다면 아무리 작은 죄라도 큰 벌을 받을 것이네.
나는 성실함과 능력으로 황흔을 받았네.
관망하고 눈치를 보는것은 부질 없는 일이야!"
옹정제는 이런 악이태에게 지대한 관심을 주어서,
악이태가 몸이 아프자 사람을 불러 수명을
점쳐(의외로 옹정제는 이쪽에 관심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악이태가 아직 한참 더 산다는 결과가 나오니 안심하는가 하면,
특별히 황제의 가마를 타고 가게 하기도 합니다.
건륭제는 이런 모습을 보고 훗날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악이태, 전문경, 이위는 선황께서 가장 칭찬을 한 인물들이네.
하지만 전문경은 이위만 못하고, 이위는 또 악이태만 못하네."
3. 장정옥
이 장정옥에 대한 신임이 더 남다른 이유가 장정옥은 만주족하곤
별 관련이 없는 한족 출신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한족 출신이지만 장정옥은 강희, 옹정, 건륭 3대에 걸쳐 요직을 담당한 인물이었죠.
장정옥은 옹정제가 즉위하기전부터 요직을 담당하고 있었고,
옹정제는 계속 그를 중용했습니다.
특히 그에게는 다른 신하들에게 없는 빼어난 문장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지를 작성할때 다른 신하들이 옹정제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던 반면에,
장정옥은 옹정제의 의도를 완벽히 파악해서 작성했는데,
그 속도도 대단했습니다.
문어체도 아닌 구어체로 옹정제가 말을 해도 바로 옆에서
거의 동일한 속도로 문어체로 글을 작성해서 나무랄데 없는
문장으로 탄생하게되었죠.
이건 옹정제의 다른 신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장정옥은 겸손하고 과묵했는데,
신하들이 개기는것을 정말 싫어하는 옹정제는
이 충실한 일꾼을 아주 마음에 들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수십년 동안 수많은 문서를 처리하고,
여름이건 겨울이건 일하는데 시간을 보냈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장정옥이 아프다는 소리를 들은 옹정제는 뜬금없이
"팔이 아프다." 고 했습니다.
신하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장정옥이 아프니 나도 팔이 아프오."
4. 전문경
비록 서류상으로 많은 보고를 듣는다 해도, 직접 본것만 못하게 됩니다.
옹정제는 중국의 명산인 화산으로 가는 길에 서북지방의
백성들이 가뭄으로 고난을 받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는데,
더군다나 이 지역의 순무가 실상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농간을 부렸기 때문에 옹정제는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전문경은 관료 사회의 "서로 대충 봐주고 넘어가기." 를 넘어서
바로 직언을 올리면서 옹정제의 신임을 사게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전문경은 30년 동안 하급 관리로 구른 탓이라
어떻게든 황제의 눈에 들어오고 싶어했을 수도있습니다.
제발 큰 일을 맡을 기회만 있었으면,
하고 있던 전문경은 이제 하남의 순무로 한성의 대권을 장악하게 되자
물만난듯이 일을 벌였습니다. 뇌물수수 관행을 뿌리뽑고,
재정 적자를 해결하고 몰래 숨긴 토지를 찾아냈습니다,
하급 관리 일을 통해 실무 능력과 현장 상황도 이미 훤이 꿰고 있었죠.
자연히 이런 급진적인 개혁은 그 지역의 지주 계층의 커다란 반발을 샀는데,
사방에서 탄핵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옹정제는 전문경의 그런 면모를 아주 흥미로워 하며 믿어주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남성의 순무로 가장 오래 재직하는 기록을 남깁니다.
공직사회에서 전문경은 왕따였습니다. 개인적인 책임감이든,
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의 몸부림이든 그는 어찌되었건
당파나 기득권에 얾매이지 않고 죄다 처리했죠.
심지어 장정옥의 친동생이 죄를 짓자 뒷배경 다 무시하고
그를 처벌해서 장정옥을 불쾌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옹정제는 이런 전문경에게 이렇게 표현했죠.
"만약 전문경과 악이태를 얻지 못했다면
짐은 실로 하늘의 용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5. 이위
이위는 사실 과거제도로 합격한 관리는 아니고,
돈으로 관리가 되는 제도를 이용해서
관직 생활을 했지만 정작 명신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게다가 이위는 별로 성격도 좋지가 못했습니다.
오만방자할뿐더러, 거칠기까지 했죠.
오죽하면 옹정제가 이렇게 말 할 정도였습니다.
"걔는 원래 그런데 뭘 새삼스럽게 그런걸로 또 까냐?"
그런데 아무 능력도 없는 인물에게
옹정제가 이렇게 관대한 태도를 보이질 않겠죠.
사실 관료로서의 능력으로 말하자면 이위는 그 부분에서도
썩 좋은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깨끗한 청렴감과,
무엇보다 한번 밀어부칠때 앞뒤 잴것 없는
과감한 면이 옹정제의 맘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이위는 하급자면서 상급자를 마구 까고 다녔는데,
이 뒷배경에는 옹정제의 비호가 있었습니다.
이위를 이용해서 옹정제는 그들을 돌려서 비판을 했던 것이죠.
이위가 얼마나 관료 사회에서 개차반 취급을 받았는지,
이위는 여러 행정부에게 까이고 다녔죠.
예를 들자면 이위가
소금 관련 문제로 호부에 몇번이나 협조를 구했지만,
호부가 씹어버리면서 쩔쩔 매게 됬지요.
옹정제의 도움으로 협조는 간신히 얻어내었지만,
호부는 이위를 비웃을 의도로 일부러 문서에서 이위의 지위를 "염정" 즉
당나라때 소금을 전매하던 관리로 낮춰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위는 청렴했으며, 과감하기까지 했습니다.
옹정제가 지정은제를 확립할떄의 일입니다.
기득권인 향신 측은 대규모 시위 집회를 반복하며 정책에 반대를 했는데,
이위는 비난을 무릎쓰고 그들을 떄려잡으며 정책을 밀고 나갔습니다.
물론 지금 시각으로 보면 막장스럽지만 이 시기에 시위를 벌이던
계층은 "기득권 층" 이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진압하는것은
기득권 층과 척을 지는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옹정제에게 있어 이위는 믿음직한 호위병과도 같았죠.
이위에 대한 애정이 깊은 옹정제는 항상 이위에게 충고를 하면서
그 성질머리를 고쳐보려고도 했습니다.
무려 이위의 나이가 50이 되었는데 동네 어린이에게 하듯이
"성질을 죽여라." 라고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옹정제가 일보던 곳 옹화궁,융허궁 (옹정제의 거처)
이친왕은 황족이고, 장정옥은 선황때부터 있었으니,
이위 - 전문경 - 악이태를 옹정제 시기의 3명신으로 봅니다.
옹정제가 윤계선이라는 인물에게
이들의 평가를 묻자 윤계선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신은 이위의 용감성을 배우고 싶으나,
거친 면은 배워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전문경에게는 근면성을 배워야 하지만 지나친 철저함은 또한 안될 일입니다.
악이태는 배울 점이 참으로 많지만, 괴팍함은 배우지 않아야 하겠지요."
이권홍의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옹정의 죽음
옹정 13년(1735) 원명원(圓明園)에서 급사했다.
넷째 홍력(弘歷)에게 황위를 물려줬다.
익호는 헌(憲)이요 태릉(泰陵)에 묻혔다.
1735년 옹정 황제는 북경의 교외지역 원명원에서 갑자기 죽었다.
옹정 황제의 사인에 대해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의견은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상유내각上諭內閣』과 『주비유지朱批諭旨』 등 공문 기록에 근거하면
옹정 7년(1729) 겨울부터 옹정제가 큰 병을 얻었고
옹정 9년(1731) 가을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못했다.
오한과 신열이 계속됐고 음식을 잘 먹지 못했으며 불면에 빠졌다.
도대체 무슨 병이었을까? 태의(太醫)도 확신하지 못했다.
옹정제는 전문경(田文鏡), 이위(李衛), 얼타이(Orta, 악이태(鄂爾泰)) 등
심복들에게 비밀리에 유지(諭旨)를 내려 좋은 의사를 추천하도록 했다.
이후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으나 몸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옹정 13년(1735) 음력 8월 20일 홍정제는 병세가 악화됐지만 업무를 멈추지 않았다.
23일 밤 병세는 격화돼
보(寶)친왕 홍력(弘歷),
화(和)친왕 홍주(弘晝),
장(莊)친왕 윤록(允祿),
예(禮)친왕 윤례(允禮),
그리고 대학사, 내대신 등
여럿을 불러 모아 ‘유조(遺詔)’를 내린 후 새벽에 붕어했다고 한다.
옹정제가 병으로 죽었다는 관점은 조리정연하다.
심지어 옹정제는 ‘중풍’으로 쓰러져 죽었다고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
옹정제가 사망한 그날 밤에 대해
보화전(保和殿) 대학사,
한림원 장원(掌院)학사,
군기대신, 이부상서 장정옥(張廷玉)의
『자정연보自訂年譜』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옹정 13년 8월 22일 밤.
물시계가 이경(二更, 밤 아홉 시부터 열한 시 사이)을 알렸다.
음랭한 가을바람이 갑자기 일더니 처마와 나뭇가지를 스쳐지나갔다.
흩어져 있던 자질구레한 마른 나뭇잎들이 빙빙 도는 소리와
적막하며 공허한 격자창이 여닫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장정옥은 막 눈을 감았다.
갑자기 대택 정문 방향에서 ‘탕탕’ 문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란스러움 속에서 귀를 찌르는 높고 가는 목소리였다.
“황상의 명이요! 장대인은 즉시 궁으로 들라하십니다!
” 장정옥은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허둥대며 이불을 밀어재치고 옷을 걸친 후 몸을 돌려 바닥으로 내려섰다.
장화를 신고 손으로 고리를 채우고서는
급히 밖으로 뛰쳐나가면서
생길 수 있는 모든 변고들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궁금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흔들거리는 등롱이 비추는 하늘하늘 부서지는 어두운 불빛 아래서
장정옥 일행은 원명원을 향해 황급히 달려갔다.
원명원 서남문에는 서너 명의 태감이 목을 빼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정옥이 도착하는 것을 보고
태감 두 명이 안으로 달려 들어가 보고했다.
남아 있던 태감들은 장정옥 등을 곧장 침궁(寢宮)으로 안내했다.
침궁의 불빛은 밝았다.
태의와 내시만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계단 아래에는 사람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중얼중얼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새까맣게 늘어서있었다.
장친왕, 과(果)친왕, 대학사 얼타이, 펀선거(Fenšengge, 풍성액(豊盛額)),
나친(Nacin, 납친(訥親), 혹은 (納親)), 내대신 하이왕(Haiwang,
해왕(海望))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했다.
장정옥은 생벼락 맞은 듯 몹시 놀랐다.
결코 생각지도 못했다,
깊은 밤에 불러 모은 까닭이
“황상의 질병이 극에 달했다”는 것임을.
낮에 일상적으로 정무를 봤던 옹정제가
놀랍게도 임종의 마지막 고비였다!
장정옥과 여러 대신들은 순번에 따라
두 줄로 서서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침궁의 침대 앞으로 나아가
삼고구배하며 황상의 평안을 축원했다.
촉광이 어두웠다.
위장이 겹겹이 쳐있었다.
침상 위의 옹정제는 안쪽을 향해 누워 있었다.
머리를 볼 수 없었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러 대신들을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긴장되고 우려하는 마음으로
몸을 굽힌 채 나와 계단 아래에서 소식을 기다렸다.
갑자기 궁문이 활짝 열렸다.
우는 듯 참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행황제 용가가 승천하셨습니다.”
여러 대신들은 마음속으로는 이미 준비됐지만
부음이 흘러나오자 땅에 꼬꾸라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방성대곡했다.
혼란 중에도 장정옥과 얼타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소리를 쳤다.
“지금 울 때가 아니오!
나라에 하루라도 주인이 없어서는 안 되는 법이오.
대행황제가 황위를 물려주는 것이
크나큰 일이라 일찍이 밀지를 써 놨소.
우리 둘 이외에 아는 사람이 없소.
그 밀지는 궁중에 숨겨져 있을 것이니
마땅히 꺼내와 대통을 바로 세워야 하오.”
“옳소! 그래야 하오!”
마음이 혼란했던 두 왕야(王爺)가 꿈에서 막 깬 듯
총관 태감에게 어찌하여 빨리 옹정제의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라 쓴 밀지를 꺼내오지 않느냐고 책망했다.
총관 태감은 놀라 땅에 무릎을 꿇고 방아 찧듯 고두하며
“노재(奴才)가 죽어야 합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대행황제께서 밀지에 대한 일을 알려주지 않아서
노재는 밀지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장정옥은
“대행황제께서 당일 밀지를 밀봉할 때
많이 남지 않았다 생각하시고 외용 황지로 단단히 봉한 후
뒷면에 ‘봉(封)’자를 쓰셨소.
바로 그게 밀지요.”
얼마 없어 총관 태감이 허둥지둥 황색 봉투 하나를 받쳐 들고 나왔다.
여러 대신들이 열고 보니 바로 옹정제가 주필(朱筆)로
친히 건륭(乾隆)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준다는 그 밀지였다.
두 번째 설은 옹정제가 단약(丹藥)을 복용해 중독돼 죽었다는 의견이다.
궁중 문서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옹정제는 「소단燒丹」이란 시를 쓰면서까지
단약의 효능에 대해 찬양했고
자신도 평상시에 단약을 즐겨 먹었다.
어떤 때는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얼타이도 하사 받아 복용한 적이 있었다.
하사 받은 자는 1개월 후
“대단히 효능이 있습니다”라고 아뢰어야 했다.
이와 동시에 옹정제는 자양진인(紫陽眞人)을 추숭해
그를 위해 도관을 중건하고 진인이 “금단을 발명했다”고 찬양하기도 했다.
궁중에 적지 않은 도사들을 부양했다.
연단(煉丹)하는 이도 있었고 주문을 외는 이도 있었고
안마술(按摩術)을 행하는 이도 있었다.
그는 도사들이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도사 장태허(張太虛), 왕정건(王定乾) 등은 원명원에서
옹정제를 위해 단약을 제조했다.
백 톤이나 되는 연료를 태우면 한 알 한 알 씩 금단(金丹)이 완성돼 나왔다.
옹정제는 다량의 단약을 복용했다.
끝내는 금단 중 유독성분이 체내에 쌓이면서
발작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본다.
8월 25일은 옹정제가 죽은 이튿날이었다.
당일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건륭제는
장태허 등 도사들을 쫓아내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옹정제의 사인(死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방증이라 보는 것이다.
세 번째 설은 피살됐다고 하는 의견이다.
그렇다면 흉수는 누구인가?
이 또한 일치된 의견이 없다.
그중 많은 야사에서는 옹정제가 여류량(呂留良)의 손녀
여사낭(呂四娘)에 의해 척살 당했다고 돼 있다.
여류량은 청나라 초기의 사상가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시도했던 인물이다.
그의 학생이 반청 책동을 하다 실패하자
여류량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지만 그의 친족들은 연루돼 죽임을 당했다.
손녀 여사낭만이 다른 곳에서 모친을 모시고 있었던 관계로 다행히 화를 면했다.
그녀는 그 후 명산대찰에 은거하면서 스승을 모시고 기예를 배웠다.
뛰어난 절기를 배워 부친과 조부를 위해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그녀는 궁에 잠입해 마침내 옹정제를 척살했다고 한다.
또 옹정제를 모살한 것은 여사낭이 아니고
궁녀와 태감 오수의(吳守義), 곽성인(霍成因)이
옹정제의 학대에 원한을 품고 그가 잠든 틈을 이용해
밧줄로 목 졸라 죽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도대체 옹정제는 중풍으로 급사한 것인가,
아니면 맹목적으로 단약을 복용해 중독돼 죽음에 이른 것인가?
그렇지도 않다면 암살을 당한 것인가?
아직까지도 확답할 수 없는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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