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의 청나라 시대의 왕은 총 몇 대까지 있었나
12대까지 있었습니다.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 아시죠?
그게 바로 중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의 얘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2. 청나라의 황제 계보
1대 - 태조(누르하치)
2대 - 태종(홍타시, 황태극)
3대 - 세조(순치제)
4대 - 강희제(현엽)
5대 - 옹정제(윤진)
6대 - 건륭제(홍력)
7대 - 가경제(옹염)
8대 - 도광제(민녕)
9대 - 함풍제(혁저)
10대 - 동치제(재순)
11대 - 광서제(재첨)
12대 - 선통제(부의, 푸의)
3. 가장 강성했던 왕이 누구?
4대 황제인 강희제를 꼽겠습니다.
중국을 통일하고 러시아와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았으며,
조선과 경계비를 세워 경계하는 등
중국 최대의 세력확장을 하였고,
그리하여 청나라는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4. 청나라 왕조의 성은 무엇이었는지..
아이신교로(愛新覺羅)씨 입니다.
청 태조 누르하치 여진족을 통합하고사르후
전투에서 압도적인 기동력으로 10만의 대군을
2만으로 각개격파, 완벽한 승리를 거둠
요동에서 기선을 잡게 됨
청 태종 홍타이지
청의 행정제도를 개편하고 팔기군제를 확립했으며,
조선을 쳐서 배후를 안정시키고 몽골과 동북지역을 석권하여
중원 진출의 기반을 마련하고 원숭환을 책략으로 죽게함
명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황조라고 선포하고
과거 제도를 수용하여 인재들을 모음
청나라 초기의 황족 도르곤이 죽기 전에
청나라에서 이미 황제 위의 황제인 '태상황'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맨 처음 섭정왕으로부터 한발 한발 권력을 장악하여
순치제의 아버지로 되었는데요,
그때 당시 도르곤의 권력은 태상황과 같았고
심지어 대권을 손이 다 거머쥐고 있는 황제 위의 황제였습니다.
그래서 도르곤이 나중에 '청성종(清成宗)'으로 추봉 되었는데,
이는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도르곤의 공로를 따지고 보아도
황제로 추봉될 자격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지요.
1643년에 황태극이 급사하고 1644년에 명나라가 이자성에 의해 멸망하자,
그때 당시의 실제 통치자였던 섭정왕 도르곤은
청나라 군이 관내로 들어오는 걸 결정했는데,
이는 청나라의 이백여 년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큰 결정이었고,
청나라가 할거 정권에서 대일통으로 발전하게 된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3대 - 세조 순치제
순치제 풀린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불러
대포 기술과 고딕 양식의 건축 기술을 들여와
북경에 고딕 양식의 성당을 지음
4대 강희제(현엽) 히오완예이
이른바 천고일제, 천년에 한번 나올만한 황제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제로 평가받음
북방과 남방을 안정시키고 유교를 받을어 나라를 안정시키고
스스로는 수많은 책과 정보를 익혀 어마어마한 지식을 가지고
서양인들마저도 "기독교만 믿으면 가장 완벽한 황제" 라고 평가함
제갈량의 출사표를 보고 鞠躬盡瘁 鞠躬盡瘁,
즉 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죽기까지 힘쓴다는
글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 이를 실천했으며
'전하 이 글은 신하가 황제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글이니
황제께선 그럴필요 없사옵니다' 라고 말하는 신하에게
'짐은 하늘을 섬기는 신하로다'
5대 옹정황제의 실제 초상화
5대 옹정제(윤진) 인전
티베트를 온건하게 합병하고 팔기군 체제를 손보고 군기처 확립
평생동안 세벽 4시에 일어나서 그 날이 완전히 끝나는
밤까지 매일동안 일해 관리들조차 기겁할 정도
당시 서양인들에게 "기독교를 탄압하지만 명군"
이다라는 평가를 받음 스스로 남긴 말은
"이 한 몸을 위해서 천하를 희생시키지는 않으리라"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불리는
강희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옹정제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극.
강희제 61년의 치세에 비해 13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어느 황제보다 많은 일을 했으며
청조의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여 왕조를 반석위에 올려 놓았다. .
옹정황제는 청나라 강희제의 4남이자
건륭제의 부친으로 중국인들이 '강건성세'라고 부르는
청조의 최전성기 한가운데에 끼여있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거쳐 대권을 잡았고,
13년의 재위기간 중 '냉혈왕'으로 불릴 정도로 잔혹한 정치를 펼쳤다
옹정제
1678년 강희제의 4째아들로 출생.
1708년 둘째형인 황태자 폐위됨.
1709년 둘째형 황태자에 다시 복위됨.
1712년 둘째형 다시 폐위됨.
1718년 14째 동복동생이 대장군에 임명되어 서역원정.
1722년 강희제 11월 사망, 옹정제 즉위.
1723년 14째를 소환 강희제의 릉을 지키게 함, 황제의 훈유를 지방관에게 하달.
1724년 전문경을 허난성 순무로 임명, 폐태자사망, 연갱요가 청해반란 진압.
1725년 연갱요를 좌천시킨 후 자살토록 함, 오르타이,이위등을 총독, 순무에 임명.
1726년 8째,9째동생 사망, 묘족에 대한 개토귀류 단행.
1727년 융과다가 탄핵되어 감금됨.
1729년 푸르단을 대장군에 임명 준가르부 정벌시작.
1730년 13째동생 이친왕 사망.
1731년 푸르단이 대패, 책릉친왕이 준가르부 격파.
1732년 전문경사직.
1735년 옹정제 사망, 건륭제 즉위.
5대 옹정황제의 실제 초상화
이런것도 있음...서양 가발을 쓴 모습ㅋㅋㅋㅋ
◈옹정제에게서 배울점.
많은 권력자들이 자신의 탐욕과 향락을 위해 권력을 이용했으며
이는 또한 권력을 탐하는 많은 이들의 목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황제라는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던
옹정제는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의 각오대로 권력은 나라와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해 주어진
수단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
코피를 쏟고 수명을 단축시켜가며 정무를 봤습니다.
반면 자신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위한 노력과 지출에는 너무나 인색했습니다.
옹정제야말로 모든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하지만 가장 지켜지지 않는
기본적인 지도자의 덕목 즉, 리더쉽을 보여준 황제였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60여년간 집권한데 반해
13년밖에 황제자리에 있지 못한 옹정제를
보면 지위의 높음에 비례하는 책임성에도 불구하고 편안함과
장수를 누리는 것은 지도자에게 부끄러운 사치라는 생각을 하도록 합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가 헛된 말이 아니니, 스스로 악업(惡業)을 쌓지는 말아야...>
6대 - 건륭제(홍력)
최대 판도로 영토를 넒히고 10번의 원정을 수행함
건륭제(乾隆帝, 강희(康熙) 50년
음력 8월 13일 (1711년 9월 25일) ~ 가경(嘉慶) 4년
청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1735년 ~ 1796년[1])로
정통 황조로서의 네 번째의 중국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홍력(弘曆)[2],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부문분무흠명효자신성
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짧은 시호로는 순황제(純皇帝)이며,
또한 만주어로는 압카이 워히여허 한(Abkai Wehiyehe Han),
몽골어로는 텡게린 테트게센 칸(Tengeriin Tetgesen Khaan)이라 불리기도 한다.
제4대 황제 강희제(<st1:personname w:st="on">康熙帝</st1:personname>)의 손자이자
옹정제의 후궁 출신인 효성헌황후 뉴호록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의 소생이다.
(家族關係)
건륭제는 3명의 황후와 5명의 황귀비, 5명의 귀비 등을 두었고 슬하에 17남 10녀를 두었다.
(조부모와 부모)
조부: 성조 강희인황제(聖祖 康熙仁皇帝) 현엽(玄燁)
조모: 효공인황후 오아씨(孝恭仁皇后 烏雅氏)
부친: 세종 옹정헌황제(世宗 雍正憲皇帝) 윤진(胤禛)
모친: 효성헌황후 뉴호록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
(황후)
효현순황후 부찰씨(孝賢純皇后 富察氏, 1712년 ~ 1748년) -
계황후 오랍나랍씨(繼皇后 烏拉羅拉氏, 1718년 ~ 1766년) -
원래 칭호 한황귀비(嫻皇貴妃). 좌령 나이포의 딸.
효의순황후 위가씨(孝儀純皇后 魏佳氏, 1727년 ~ 1775년) -
원래 칭호 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 내관령 위청태의 딸.
(아들들)
제1황자 정안친왕 영황(定安親王 永璜, 1728년 ~ 1750년) - 철민황귀비 소생.
제2황자 단혜황태자 영련(端慧皇太子 永璉, 1730년 ~ 1738년) - 효현순황후 소생,
사망 후 황태자로 추봉.
제5황자 영순친왕 영기(榮純親王 永琪, 1741년 ~ 1766년) - 유귀비 소생.
제6황자 질장친왕 영용(質莊親王 永瑢, 1743년 ~ 1790년) - 순혜황귀비 소생.
제7황자 철친왕 영종(哲親王 永琮, 1746년 ~ 1747년) - 효현순황후 소생.
제8황자 의신친왕 영선(儀愼親王 永璇, 1743년 ~ 1832년) - 숙가황귀비 소생.
제10황자 성철친왕 영성(成哲親王 永瑆, 1752년 ~ 1823년) - 숙가황귀비 소생.
제15황자 가친왕 영염(嘉親王永琰, 1760년 ~ 1820년) - 효의순황후 소생,
후에 옹염(顒琰)으로 개명. 제7대 황제 인종 가경예황제(仁宗 嘉慶睿皇帝).
제17황자 경희친왕 영린(慶僖親王 永璘, 1766년 ~ 1820년) - 효의순황후 소생.
7대 - 가경제(옹염)
가경제(嘉慶帝, 1760년 11월 13일 ~ 1820년 9월 2일)는
청 왕조의 제7대 황제(재위 1796년 ~ 1820년)이다.
묘호는 인종(仁宗)이다. 건륭제의 15남이다.
가경제의 이름은 옹염, 시호는 예제 묘호는 인종으로,
그는 건륭제 이후 쇠퇴하고 있던 청제국을 부분적이나마 되살리려 노력했다.
황실재정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폭도들이 길에서 가경제를 습격했으며,
1813년에는 한 무리의 음모자들이 궁전을 급습하려 했다.
그는 청조의 가장 인기없는 황제로 삶을 마쳤다.
1795년 아버지 건륭제가 퇴위하자 즉위하여 가경이라는 연호를 썼다.
그러나 1799년까지는 아버지와 부패한 관리 화신이 권력을 계속 장악했고,
가경제 자신은 의식행사를 이끄는 정도의 일만을 했다.
그동안 중국 중부와 서부에서 백련교도의 난(1796년~1804년)이 일어났으며,
화신과 그 측근들이 군비를 횡령하려 한 탓에 반란진압이 늦어졌다.
1799년 아버지 건륭제가 붕어하자 가경제는
즉시 화신을 잡아들여 자살하도록 했으며,
난을 진압하기 위해 능력있는 장군들을 기용했다.
그러나 힘이 고갈된 청군이 난을 수습하는 데는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또 남해안에는 해적들이 들끓기 시작하여 교역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으나,
1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이들을 소탕할 수 있었다.
건륭제가 죽고 화신이 제거된 뒤에
가경제는 황실재정을 복구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는 강력한 통치자가 못되어서
만연한 관리들의 부패를 없애기보다는
궁중의 경비를 줄이는 정책을 취했다.
이런 조치는 황족들을 섭섭하게 했다.
이 정책은 국가재정을 복구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을 했으나
조정이 갈수록 무력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정부수입을 더 늘리기 위해 높은 관직을 팔았던 것 때문에
실제로 가경제 대에들어서 부패는 아버지 건륭제보다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백성들의 세금 부담은 여전히 과중한 상태였다.
8대 - 도광제(민녕)
도광제(道光帝, 1782년 9월 16일 ~ 1850년 2월 25일)는
중국 청의 제8대 황제(재위 1820년 ~ 1850년)이다.
휘는 민녕(旻寧), 묘호는 선종(宣宗)이다.
가경제의 차남으로 태어나서 지친왕(智親王)으로 봉해졌다.
즉위 후 영국계 동인도 회사가 전개한 삼각 무역(아편무역)으로
엄청난 문제가 일어나자 임칙서로 하여금 이를 수습하게 하였다.
서구 열강이 대대적으로 쇄도해오는 길을 열어주었다.
9대 - 함풍제(혁저)
함풍제(咸豊帝, 1831년 7월 17일 ~ 1861년 8월 22일)은
중국 청 왕조의 제9대 황제(재위 1850년 ~ 1861년)이다.
휘는 혁저(奕詝)이며, 묘호는 문종(文宗)이다
10대 - 동치제(재순)
동치제(同治帝, 1856년 4월 27일 ~ 1875년 1월 12일)은
중국 청 왕조의 제10대 황제(재위 1861년 ~ 1875년)이다.
휘는 재순(載淳), 묘호는 목종(穆宗)이며, 동치는 연호이다.
(정책)
개혁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양무운동은 청나라의 만주족 지배층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조정의 실권자인 서태후가 그를 후원하였으며,
이홍장 역시 한족이기는 하나,
청나라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양무운동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독일, 영국 등 외국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이홍장의 북양군을 훈련시켰으며,
서양에서 들어온 무기와 기술을 이용하여
이홍장은 강력한 군사력을 자기의 손에 쥐게 된다.
이홍장의 북양군은 북양함대를 구성하고,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과 톈진 주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이홍장의 북양군이 청일 전쟁에서 대패한 후,
북양군은 몰락했으며,
이홍장 및 양무운동을 주장한 세력들의 발언권은 크게 쇠퇴한다.
진사가 된 캉유웨이는 이후 여러차례 청나라를 개혁할 내용을 담은
상소를 올려 당시 황제였던 광서제의 눈에 띄게 된다.
그 중 중요한 것이 1889년의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이다.
광서제는 당시 서태후의 손아귀에 휘둘리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개혁 정치를 추구하기 위해
캉유웨이의 갖가지 정책을 지지하게 된다.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책에는 과거 제도 개혁,
탐관오리 혁파, 각종 경제 개혁 등이 담겨 있었고,
무술변법을 통해 이중 일부를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변법은 광서제의 권위에만 의존했으며,
결국 서태후 등 반개혁파에게 패배해
외국으로 망명을 가는 결과로 끝이 난다.
이로 인해 무술변법은 '100일 변법'이라고도 불린다.
(의화단)
의화단은 원래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 걸쳐
만주족의 청나라에 대해 여러차례 봉기를 일으킨
백련교 계통의 비밀결사 '대도회'(大刀會)의 일파이다.
원래는 반청 단체였는데 청나라 말기 서태후는
이들을 구슬려 외세에 대항하는 단체로 삼았으며,
반청(反淸)의 구호대신 "청조를 돕고 외국을 멸한다.
"(부청멸양, 扶淸滅洋)의 구호로 바꾸게 하였다.
1900년 서태후는 이들에게
열강 8국 (러시아, 일본,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그러나 열강들에 의해 베이징은 함락되었고,
서태후는 시안으로 도망가게 된다.
의화단은 진압되었고 1901년 신축 조약에서
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하며 불평등 조약까지 맺게 되었다.
서태후는 1908년 11월 15일 붕어하였고,
죽기 직전 부의를 황제로 정하면서 다시는 자신처럼
여인이 정사에 관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조를 남겼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청나라는 신해혁명에 의해 1912년 2월 12일에 종말을 고했다.
목종의 모친 서태후
서태후(西太后, 1835년 11월 29일 ~ 1908년 11월 15일)는
일명 자희태후(慈禧太后), 노불야(老佛爺)라고 지칭되며
성은 예흐나라(葉赫那拉, 엽혁나랍),
이름은 행정(杏貞) 혹은 행아(杏兒)라고 전해진다.
네이멍구 후허하오터설, 산시 성 창치설 등으로 되어있다.
시호는 효흠자희단우강이소예장성수공흠헌숭희배천흥성현황후
(孝欽慈禧端佑康頤昭豫莊誠壽恭欽獻崇熙配天興聖顯皇后),
줄여서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라고 부른다.
(생애)
혜징이라는 관리의 딸로서,
17세에 문종의 왕비가 되었다.
약 40년 동안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중국을 노리는 서양 세력이 미치던 당시의
캉유웨이의 개혁 운동을 억압하였다.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자
외국 세력을 내쫓겠다는 농민들을 도와주다가,
도리어 외국 세력에게 꺾여 청나라의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다.
황제를 뛰어넘는 권력으로 중국대륙을 약 50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녀는 함풍제의 의귀비(懿貴妃)에 책봉되었고,
아들이 황위에 오르면서
서태후(西太后), 자희태후(慈禧太后) 등으로 불리었다.
동치제 즉위 후,
동태후(東太后)와 서태후(西太后)가 같이 섭정을 하면서,
이러한 분위기에 호응하여,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정신이 함양된 양무(洋務)운동이 시작되었다.
두 태후인 동태후와 서태후가 섭정하는 동시에
숙부인 공친왕마저 정치 일선에 나서서 정국에 혼란이 가중되었고,
정권을 계속 유지하는 생모 서태후와
친정을 하고 싶은 동치제 간의 알력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동치제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천연두로 사거하였다.
11대 덕종 광서제(재첨) (서태후의 조카)
12대 - 선통제(부의, 푸의)
청나라의 마지막 12대 황제 선통제
황제의 칭호는 1924년까지 유지,
묘호는 공종(恭宗)[1],
그리고 만주국의 황제인
강덕황제(중국어: 康德皇帝, (일본어: 愛新覚羅溥儀, 1934년 ~ 1945년)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전국 위원을 지냈다.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로 널리 알려져 있고
도광제의 증손자이기도 한다.
시호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예인입효양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襄皇帝)이다.
'자료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나라 후궁들의 계급 (0) | 2012.08.28 |
---|---|
옹정제 (0) | 2012.08.24 |
아름다운 열두 달 우리말 이름 (0) | 2012.08.21 |
한국의 성씨 이야기 (0) | 2012.08.13 |
월별로 계절을 표현하는 단어들 (0) | 2012.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