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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후궁들의 계급

월광화 2012. 8. 28. 11:52

 

 

 

 

지금은 해마다 열리는 수많은 미인대회가 보편적인 세상이지만

과거에도 이러한 ‘미인대회’가 존재했을까?

중국 청나라 때 행해졌던 수녀(秀女, 명청대 심사과정을 거쳐 입궁한 궁녀)

선발은 현재의 미인대회와도 일면 비슷한 활동이다. 


깡마른 조비연과 뚱뚱한 양귀비, 그리고 ‘세 치 금련’ 전족의 시대까지,

중국의 시대별 미의 기준도 다양하다.

 

그러나 청나라가 공인한 미인,

즉 수녀 선발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기준은 만주족 혈통.

 

이는 청 황실이 만주족 귀족의 존엄과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이 시대는 혈통과 가문,

사회적 지위가 모두 갖추어진 이후에야

여성의 미모와 성품을 논하던 때였다.

수녀는 황제의 비빈이 되거나,

친왕, 왕자의 처가 되기 위해 입궁하는 궁녀들로,

아름다운 외모와 단정한 품행이 필수적이었다.

이 때문에 각 단계에서 철저한 평가와 심사가 이루어졌다.

 
수녀를 뽑을 시기가 되면,

우선 호부에서 각급 도통들에게

공문을 보내 여성들의 조건을 확인시킨다.

 

조건에 부합하는 수녀들의 명단은

참령, 좌령 및 족장 등이 도통에게 보고하고,

이 명단은 다시 호부를 거쳐 황제에게 보고된다.

 

황제가 이를 비준하고 수녀 선발 일자를 공표하면,

도통은 본격적인 심사를 위해 수녀 청책(일종의 원서)을 만든다.

 

이 절차가 완료된 후에는,

지방 족장이나 가족이 직접 수녀를 데리고

자금성 신무문에 가서 도착한 순서대로 줄을 서게 되는데,

이 때 첫 번째 평가 테스트가 이루어진다.

태감은 여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본 후

2차 심사에 올릴 후보들의 이름을 명단에 적는데,

이 때 이름이 적히지 않으면 탈락된다.

탈락자들은 종가의 뜻에 따라 다른 집안으로 시집가게 된다.


수녀의 필수 자격 요건은 13~17세의 미혼 여성으로,

두 번에 걸친 태감의 심사를 통과하게 되면 마침내

황제가 직접 수녀들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비빈으로 삼을지,

혹은 친왕이나 왕자의 처로 삼을지 결정한다.


청나라를 호령했던 서태후 역시 소녀시절,

밑바닥부터 수녀가 되기 위한 관문을 통과하여

선풍제의 귀인으로 봉해지고,

비까지 지위가 상승하다가 선풍제 서거 후에

태후에 봉해져 동태후와 함께 정사를 돌보다 권력을 잡았다.

일개 수녀였던 그가 47년간 중국을 손아귀에 쥐게 된 순간이다.


황제의 아내들은 크게 여섯 계급으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는 황후로,

한 명만 봉해지며 내궁의 사무를 다스리고 관장한다.

 

두 번째는 비이다.

비는 황귀비 한 명,

귀비 두 명,

비 네 명으로 구성된다.

 

세 번째는 여섯 명의 빈이다.

황후가 중궁에 기거하고,

비빈들은 동서의 십이궁에 나누어 기거한다.

 

그 아래로 귀인, 상재, 답응 등이 있다.

황제는 자신의 후궁으로 들이기 위한 수녀를 3년에 한 번 뽑았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1년에 한 번씩 뽑는 궁녀도 있었는데,

이들은 후궁을 보필하거나 궁중의 허드렛일을 위해 뽑히는

보통 궁녀들로 일반 평민의 자제이다.

 

당시 내무부 3기 관할에 속한 만 13세 여자는

모두 의무적으로  궁녀 선발에 참가했고,

 

여기에서 합격한 대부분의 여자들이 궁녀가 되었다.

입궁 후에는 황제의 눈에 들어 비빈에 봉해질 수도 있었으나,

황제의 눈에 들지 못한 대다수의 여성들은

궁에서 25년간 일한 후에야 출궁하여 결혼할 수 있었다.


아무나 수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반대로 원치 않는 수녀의 운명을 피하기도 쉽지 않다.

 

순치제 때부터 만주인,

몽골인 및 팔기 소속 한인 등 청나라 개국공신 집안의

소녀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의무적으로

수녀 선발에 참가해야 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수녀가 되지 않으려는 소녀들은

스무 살까지 혼인이 금지되었고 행정 책임자가 문책을 당했다.

 

이어 건륭제 때에 이르면 수녀 선발 참가 전까지

여자들의 결혼을 전면 금지하기에 이른다.


수녀가 된 후에도 순탄한 삶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수녀 선발 및 비빈으로의 책봉엔 집안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 혈통과 집안은 수녀 선발과

입궁 여부뿐 아니라 후일 책봉될 후궁 지위 등 궁에서의

앞날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외모가 매우 추했다고 전해지는

융유가 광서제의 황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자희황태후의 질녀였던 덕분이며,

진비는 아버지가 시랑장서,

조부가 총독이라는 빵빵한 뒷배경으로 입궁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반면, ‘빽’이 없어 책봉되지 못한 수녀들은 냉궁에서

생과부로 여생을 보내거나 평생 지위 높은

비빈들의 시중을 들어주며 사는 수 밖에 없었다.

 

운 좋게 비빈이 된 수녀들도 황제가 죽은 후에는 규율에 따라

모두 자금성 융종문 밖의 자녕궁으로 옮겨져 청춘을 허비했다.

 

자녕궁에 특히 많은 불당이 이곳을 거쳐갔던

수많은 태후, 태빈, 태비들이 불교에 기대어

공허함을 채웠던 흔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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