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어진
1795년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하여 수원으로 행차하던
그 8일 간의 여정과 준비과정 등을 낱낱이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드라마틱하게 복원한 프로였다.
자신의 행차를 행복한 축제 '행행'으로 명명한 정조의 행차는
33년 전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어야만 했던,
생부 사도세자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다.
다른 의궤들과 달리 널리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를 바랐던
정조의 의중이 반영되어 인쇄본으로 제작된 여덟 권의 의궤 속의
그 세밀한 준비과정과 축제의 묘사는 3D로 충실히 복원되어
아름다운 영상과 교차되며 화면 전체를 압도한다.
정조의 의궤는 단순히 왕실의 의식을 기록하는 형식적인 문서가 아니라
축제를 함께 하며 나눔을 베풀고자 했던 백성을 향한 진솔한 사랑의 표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의 예,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에 대한 은밀한 견제 등이
어우러져 또다른 정조의 개혁 정책 표방의 일환이 된다.
육천여 명을 육박하는 수행인원을 거느리고 행차하는
왕의 모습과 그 왕을 스스럼없이 구경할 수 있는 백성들의 자유로움,
사람이,
그도 왕족이 쌀을 보관하는 뒤주에 갇혀 8일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죽어간 사건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악이요, 더없는 비극이다.
게다가 가해자는 친아버지이다.
이것이 픽션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논란거리와 시사점을 던져준다.
여기에는 대치되는 시각이 있다.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는 남편 사도세자가 중증의 정신병을 가져
비상식적인 행동과 살생을 일삼았던 것으로 그려진다.
자연히 늙은 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자초했다는결론이다.
또다른 시각은 사도세자가 당쟁의 희생자였다는 것이다.
탕평책을 폈던 영조는 집권 노론 세력들을 장악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손아귀에 포섭되지 않고 문보다는 무에 관심이 많았던
사도세자는 끊임없는 공격 대상이었고 결국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손으로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시 왕권은 보이는 것과 달리 미약했었다는 시선이다.
그러니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은 집권 노론 세력이었던
친정 식구에 대한 변호쯤으로 해석된다.
물론 말로 남은 사실들의 체에는 군데군데
진실이 빠져나가기 마련이므로 완벽한 결론을 내리기란 쉽지 않다.
그 어디쯤엔가 진실은 제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다만 노론 세력들이 죄인의 자식으로 왕위 계승에 적합하지 않다고 이야기했던
정조는 할아버지에 이어 조선말 최고의 현명한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다.
그는 복수할 수 있음에도 복수하지 않고 그칠 '지'를 이야기한다.
정치는 살풀이가 아니다.
그럴 수 있음에도 그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기 위하여
신하들을 이끌고 행차한 곳은 아버지의 무덤 앞이었다.
어머니의 생일이 아닌 아버지의 생일에 어머니의 생일잔치를 계획했던 정조.
열한 살에 할아버지의 손에 죽어가는 아버지를 봐야 했던 왕.
수많은 개혁 정책을 펼쳤지만 번번이 신하들의 유교적 명분과
당파적 이기심 앞에서 좌절당해야 했던,
그럼에도 끊임없이 백성들을 위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이상주의자였던 왕.
정조의 그 아름다웠던 꿈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를 설레게 한다.
영조어진
사도세자의 죽을 때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영조38년(1762) 윤5월13일 『영조실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5월22일 나경언이 고변(告變)한 후부터 임금이 (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이에 창덕궁에 나아가 동궁과 동행하여
휘령전에 예를 행하도록 하였으나 세자가 병을 일컬으면서 가지 않으니,
임금이 도승지 조영진을 보내 다시 세자에게 예(禮)를 올리기를 재촉하였다.
세자가 집영문 밖에서 영접하고 이어서 어가를 따라 휘령전으로 나아갔다.
임금이 예(禮)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四拜禮)를 마치자,
임금이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께서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하고,
이어서 호위군사에게 명하여 궁궐 문을 4, 5겹으로 굳게 막도록 하고,
또 총관(摠管) 등으로 하여금 배열하여 시위(侍衛)하게 하면서
궁궐 담 쪽을 향하여 칼을 뽑아들게 하였다.
궁성 문을 막고 각(角)을 불어 군사를 모아 호위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으니,
영의정 신만(申晩)만 홀로 들어왔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영의정 신만과 좌의정 홍봉한, 판부사 정휘량, 도승지 이이장,
승지 한광조 등이 들어왔으나 미처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다.
영조 어진(御眞·초상화) 영조 임금의 50세 때 모습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임금이 세 대신 및 한광조 네 사람의 파직을 명하니,
모두 물러갔다.
세손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동궁에 딸린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이때 신만 ·홍봉한 ·정휘량이 다시 들어왔으나 감히 간(諫)하지 못하였고,
여러 신하들 역시 감히 간쟁하지 못했다.
임금이 시위하는 군사를 시켜 동궁의 여러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는데,
한림(翰林) 임덕제만이 굳게 엎드려서 떠나지 않으니,
임금이 엄교하기를,
“세자를 폐하였는데, 어찌 사관(史官)이 있겠는가?”하고,
사람을 시켜 붙들어 내보내게 하니,
세자가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 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하고,
이에 궁궐문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사서(司書) 임성이 말하기를,
“일이 마땅히 다시 궁궐 마당으로 들어가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하니,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映嬪)이씨가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생모(生母)로서 임금에게 밀고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 세자)을 흔들려 하십니까?”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형률을 적용하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世孫)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嬪宮)·세손(世孫) 및 여러 왕손(王孫)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알리도록 하였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
한편 조중회의 입조일기(入朝日記)를 보면,
당시 조중회는 52세로 우부승지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사건이 일어났다.
당일의 일기를 보면 “휘령전(영조의 비 정순왕후의 빈전이 있던 곳)의
정내(庭內)에 동궁이 짧은 옷과 머리에 진흙 칠을 하고 있었는데,
본인(조중회)이 자리를 벗어나 나아가 엎드려 아뢰기를 ‘옛날부터 왕세자가
비록 임금에게 죄를 지었더라도 일찍이 진흙 속에서 구르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 인심이 장차 어떻게 진정되겠습니까?
신은 만 번을 무릅쓰고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조중회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는가?
흑산도로 귀양을 보내라.’ 하였다.
그런데 밤에 귀양 보내는 것을 취소한다는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또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당일 혜경궁 홍씨가 세자가 거처하는 곳으로 가보니,
세자는 무슨 예감이 있었는지 “피하려고도 안 하고 달아나려고 하지도 않으며
학질을 앓는다는 핑계를 대고자 했으며, (사도)세자가 (문 밖으로)나가자,
임금의 엄하고 화난 음성이 들리매 사람을 보내 보니,
벌써 세자는 용포를 벗고 엎드려 계신다 했다.
또 신시(申時:오후 4시~6시)에
소주방의 쌀 담는 궤를 내오라고 한다니 어쩐 일인가” 하고 있으며,
또 세손(뒷날의 정조)이 들어가
“아비를 살려 주소서” 하니 영조가 “나가라”고 엄히 말하였다.
조금 있으니 “세자가 서인이 되었으니 서인의 아내와 아들이 궁궐에 있으면 안 된다고 하여
친정(홍봉한의 집)에서 가마를 가지고 와서 세손과 함께 친정으로 나왔으며,
세손빈은 자기의 친정(좌참찬 김시묵)에서 가마를 가지고 와서 친정으로 갔다”고 적고 있다.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령했고,
세자는 옷소매를 찢어 자결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말렸다.
세손(훗날의 정조)은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걸하였지만,
영조는 뒤주를 가져오게 한 뒤 세자에게,
그 속으로 들어가도록 한 뒤 손수 덮개를 덮고 못을 박았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7일 만에 죽자,
현 서울 시립대 옆 배봉산 기슭에 모셨는데,
정조13년 수원으로 옮기고 융능이라고 하였으며 옆에 용주사를 원찰로 정했고,
수원에 성을 쌓고 대대적으로 인공적인 도시를 만들었다.
정조도 자기가 죽은 뒤 옆에 묻어달라고 하여 부자가 나란히 누워있는 것이다.
종기로 승하한 정조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는 24년간 재위한 후,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승하한다.
조선 후기부터 왕의 독살설이 나오기 시작했고,
정조 역시 독살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후대에 회자됐다.
당시 실록을 살펴보면 정조의 죽음은 6월 14일 가벼운 종기로
내의원 서용보를 불러 진찰을 받는 데서 시작한다.
정조는 이날 진찰을 받은 후 의관 서용보를 교체해버리고,
약방문을 직접 불러주고 약을 짓게 했다.
등에 난 가벼운 종기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겨우 보름도 걸리지 않았다.
그 보름 동안 실록에는 정조가 일일이 약방문을 직접 지정해주고,
달여 오라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정조는 의원과 약과 탕제를 손수 의논했고,
어떤 약을 쓸 것인지 몇 번 먹을 것인지까지 결정했다.
이 기록은 정조의 의학실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왕실의원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상한 것은 정조가 여러 번 진찰을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고름이 다 빠지고 열이 내려 차도가 있을 만하면 다시 도지는
정조의 등창종기는 불과 보름만에 왕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결국 왕은 11세 어린 왕세자에게 대보를 넘기고 숨을 거두고 만다.
정조의 꿈과 비원은 49세, 한창 일할 나이에 돌연한 죽음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정조와 효의왕후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의빈 성씨가 정조6년(1782~1786) 문효세자를 낳았지만 세자는 일찍 죽었다.
40이 다 되도록 후손이 없던 정조가
1790년 융릉 천장 직후 수빈 박씨에게서 얻은 아들이 순조다.
38세 늦은 나이에 순조를 얻은 정조는 천장한 아버지의 무덤 발복 덕분이라고 기뻐했다.
정조가 죽은 지 5일 후 어린 순조가 등극한다.
순조가 등극하자마자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왕후는,
그날로 당장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한다.
윤행임을 도승지로, 박준원을 어영 대장으로,
황인점 등을 종척의 집사로 삼는 교지를 내린 정순왕후는 잇달아
심환지를 영의정, 이시수를 좌의정, 서용보를 우의정으로,
이만수를 예조 판서, 이득신을 공조 판서로 바꿔치운다.
이렇듯 숨가쁜 인사가 7월 4일 하루만에 일어났다. 벽파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정순왕후는 1805년 창덕궁 경복전에서 사망한다.
정조가 죽은 지 5년 후의 일이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은 실질적으로 4년 가량,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다.
정조 선황제건릉
아버지 곁에 잠든 정조
원래 정조가 묻힌 건릉(健陵)은 현재 자리가 아니다.
국장을 주도했던 정순왕후와 벽파무리는 11월 6일 현융원(융릉)
경내 옛 수원부 강무당(講武堂) 터가 길지(吉地)라면서 정조를 이곳에 장사지낸다.
수렴, 충렴과 함께 무당터, 병영터 또한 풍수에서는 흉지로 친다.
강무당이란 군사들이 훈련을 하던 병영터다.
조선의 계몽군주, 위대한 국왕 정조는 벽파에 의해 병영터 흉지에 묻히게 된 것이다.
풍수에 박식한 정조가 이 꼴을 봤으면 가슴을 치고 한탄했으리라.
효의선황후부좌
순조 21년(1821) 3월 9일 효의왕후가 69세로,
창경궁 자경전에서 승하하자 정조의 흉당이 거론됐다.
이어 9월 13일 효의왕후의 장례를 치르면서 강무당 자리에 있던,
건릉을 옛 수원부 구 향교 터로 천장해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했다.
융릉과 직선 거리로 50m 떨어진 정조의 능상에는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만 있다.
사도세자는 병풍석만,
정조는 난간석만 둘러 부자가 모자라는 부분을 서로 보충해주고 있다. 정겨움이 느껴진다.
정조의 묘호는 정종(正宗)이었으나,
광무3년(1899)년 정조로 바뀌었고 선황제(宣皇帝)로 추상된다.
사도세자의 후손이었던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태조 이성계를 고황제로 추존한 것 외에,
사도세자부터 황제로 추존하는 절차를 밟는다.
영조는 세자가 죽은 뒤에 자기 행동이 지나쳤다는 것을 뉘우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기 때문에,
나중에 사람들이 사도세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함춘원과 경모궁
일반적으로 무심하게 넘어가서 잘 모르고 있는데,
서울대 병원 본관 뒤편에 보면 조그만 문 하나가 있고,
그 옆에는 돌계단이 있다.
또 그 옆에는 안내문이 있는데,
그 안내문을 읽어보면,
그 자리는 창경궁의 동쪽 정원인 함춘원이 있던 곳이다.
이곳이 바로 정조가 사도세자의 사당을 모시고 경모궁이라고 했던 옛터이기도 하다.
경모궁의 제사는 조선말까지 이어오다가
광무3년(1899) 11월에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높이고,
신위를 종묘로 모셔 종묘에서 함께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일제는 1934년 5월 경모궁 자리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세웠고,
점차 경모궁의 건물이 없어졌다.
게다가 남아있던 건물마저도 6․25전쟁 때 불타버렸다.
위 사진은 경모궁과 함춘원을 드나들던 함춘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며,
초익공의 간결한 공포를 가진 세련된 건물이다.
최근 언론보도를 보면 종로구청에서,
경모궁 복원공사를 추진한다고 하니 뒤늦은 일이지만 반가운 일이다.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
영조는 당쟁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썼지만,
자기 아들은 당쟁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보여지니 참 아이러니하다.
참고로 말하면 <한중록>도 노론의 입장에서 쓴 책으로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해보면
노론을 두둔하고 세도세자가 죽게 된 경위를 허위로 기재한 부분이 여러 군데에 보인다.
나중 이야기이지만 사도세자가 혜경궁 홍씨 외에 여러 여자를 가까이 하여
아들을 여럿 둔 탓에 조선의 왕위가 이어져 갔으니,
정조 다음 다음인 헌종 대에 가서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손을 찾다보니 모두 사도세자가 낳은 아들의 후손이었다.
즉 철종은 사도세자의 후손이고,
고종은 사도세자의 아들에게 양자로 들어간 사람의 후손이다.
사도세자―정조―순조―(익종)―헌종―은언군―상계군―풍계군 * 은전군의 양자로 감
―전계군―회평군(원경)―영평군(경응)―철종(원범 ―은신군―남연군 ―흥녕군
*남연군은 인조의 7대손으로 은신군에게 양자로 온 것임,
―흥완군 ―흥인군 ―흥선대원군―고종-순종―은전군―풍계군―완평군
** 은언군, 은신군은 후궁 임씨의 소생이고 은전군은 후궁 박씨의 소생이다.
** 은언군, 은신군은 영조47년(1771) 2월 제주도로 귀영을 갔다가,
은신군은 그해4월12일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사사로운 이야기
정조는 꼴초대왕 이였다는데...ㅋㅋㅋ
꼴초의 거두! 정조 대왕님을 뺄 수가 없죠?
정조 대왕은 흡연에 대해 찬양하는 시를 쓴 것도 모자라
신성한 기우제에서
하급 관리들이 담배를 피워 문제가 되자
"효과 없으니 그냥 둬라" 라는
흡연에 관한한 무진장 관대한 처분을 하신 적도 있었죠.
더더구나 정조 대왕은 담배를 피울 때 가장 좋은 것은
침을 뱉는 타구를 없에고 침을 몽땅 삼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거 이거... 이것도 담배 피우는 분들만 아시겠지만
이정도 경지는 상당한 꼴초가 아니라면 접근하기 힘든 경지라고 할 수 있지요.
심지어 정조는 초계문신(抄啓文臣)의 초계문신이란 규장각 소속 연구원,
지금으로 치면 박사급 대학원생 시험에 문제를 내는데
그 문제의 주제가 "남령초" 즉 담배였습니다.
정조가 이렇게 꼴초가 된 이유는 워낙에 책을 많이 읽고
정무를 꼼꼼하게 보다보니 가슴이 답답한 병에 걸렸는데
왕인만큼 좋은 약이라고 소개되는 것들을 다 먹어봐도
효과가 없었는데 담배는 효과가 있더란 겁니다.
그 이후에 정조는 담배를 애용하게 되었죠.
그리고 효과는 담배밖에 없는데 자꾸 사람들이 담배는 나쁘다고 하니
나쁘다는 이야기를 조사 좀 해 보라고 시킵니다.
아마 정말 나빠서 금연을 해야겠다 (혹은 시켜야 겠다) 라는 마음보다는
엉터리면 반박해서 밟아 놓겠다는 마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료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태후 이야기 (0) | 2013.11.14 |
---|---|
淸 환관의 비밀고백…서태후는 대머리였다 (0) | 2013.11.14 |
비운의 사도세자..그림 (0) | 2013.08.20 |
지록위마 [指鹿爲馬] (0) | 2013.07.23 |
벚꽃의 원산지 는 우리나라 (0) | 2013.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