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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사도세자..그림

월광화 2013. 8. 20. 18:54

 

 

사도세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견도 2점  그림은 아버지 영조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묘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 국립고궁박물관은

사도세자 작품으로 추정되는 견도 2점을 보관 중이다.

2점 모두 즉흥적이면서도 간결한 소묘력이 돋보인다.

특히 '고궁회화 186번'으로 이름붙여진 그림은

강아지가 어미로 보이는 개에게 달려가지만 어미는 귀찮다는 듯 외면하고 있어

아버지인 영조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기 처지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비운의 사도세자..그림도 파격이네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인물과 산수화, 새나 짐승을 소재로 한 영모(翎毛)화,

사군자류 등 많은 그림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세자 작품이라는 견도(犬圖) 2점이 지금까지도 전한다.

봉모당(奉謀堂)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즉위년(1776년)

창덕궁에 설치한 규장각 부속 서고로 왕실 보첩과

어제(임금이 지은 문장), 어필, 어화 등을 보관했다.

 

그림을 남긴 임금은 선조, 숙종, 영조, 장조(사도세자), 정조 등 5명이다.

숙종은 문인화에 취향을 뒀다.

숙종 어화는 용그림에 찬사의 글을 적은 것,

대나무와 매죽을 표현한 것 등 기록 2종이 발견된다.

영조 어화는 인물과 산수화를 비롯해 6종이 적혀 있다.

중국 그림을 모사한 '아방궁도(阿房宮圖)'도 목록에 포함돼 있다.

사도세자는 비둘기 호랑이 같은 동물 그림 등 10종으로 점수가 가장 많다.

 

조선 임금 중 글씨를 가장 잘 썼던

선조 역시 작품이 목록에 들어 있는 것을 볼 때

그림에도 남다른 재주를 가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봉모당 전적은 일제 강점기와 광복,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자취를 감춘다.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서울로 이송됐다는 증언도 있지만

당시 작성한 목록이 없다 보니 확인은 불가능하다.

봉모당에서 사라진 그림 중 일부가 국공립박물관에 소장됐을 수 있다.

 

 

 

성군의 자질 갖췄지만…
꽃피지 못한 비운의 아이콘
문무 겸비한 '천재 엄친아'

 


영조 11년 1월 21일에 태어나 이듬해 세자로 책봉된 사도세자는 지금으로 치면 영재였다.

만 2세부터 천지, 부모 등 63자를 모두 알아 읽고 쓸 수 있었으며,

대신들은 앞다퉈 세자의 글자를 받으려고까지 했다.

어린 사도세자의 영특함에 대한 일화도 있다.

「천자문」에 나오는 '사치할 치'자를 보던 사도세자가 입고 있던 반소매 옷과,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구슬 꾸미개로 장식한 모자를 가리키며

"이것이 사치한 것이다"라며 즉시 벗어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영조가 "비단과 무명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으냐?"라고 묻자

"무명이 더 나으니 무명옷을 입겠습니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9세 때는 음식을 먹고 있던 중 영조가 부르자,

세자는 급히 입에 있던 음식을 뱉고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유를 묻는 영조에게 「소학」의 가르침대로 했다고 답했고,

아버지 영조는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이런 세자의 모습은 이른바 '천재 엄친아'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만 2세에 글자를 읽고 쓰며 어린 나이답지 않은 정확한 판단력과 깊이 있는 심성,

여기에 배운 것을 실천하는 행동력까지,

모든 부모가 원하는 이상적인 자식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사도세자는 호방한 무인적인 기질과 체격을 갖추고 있었다.

힘 좋은 무사들도 들기 힘들다던 효종의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15세 때 자유롭게 다뤘고,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었으며 나는 듯이 말을 몰았다고 전해진다.

또 병서를 즐겨 읽어 속임수와 정공법을 적절히 변화시키는 오묘한 이치를 일찍 터득했다.

한마디로 문무를 겸비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영조는 사도세자가 학문에 더욱더 정진하길 바랐고 그 기준 또한 높았다.

그래서 학문보다는 무술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아들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호불호가 뚜렷했으며,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하며 학문을 익힌 영조는,

때론 공부를 빼먹고 칼싸움 놀이를 하는 세자를 호되게 꾸짖었다.

이후 칼싸움 놀이를 할 때면 사도세자는 거짓말을 했고,

그 횟수는 점차 늘었다.

기록에도 여러 차례 나와 있듯,

영조는 어린 사도세자에게 무척이나 무섭고 엄격한 아버지였다.

과도하게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거짓말이 늘고,

자존감이 낮으며,

탈선에 빠지기 쉽다는 교육학 이론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멀어진 부자 사이에 노론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그렇게까지 악화된 책임을

무조건 엄격한 아버지 영조의 탓으로 돌리긴 어렵다.

두 부자 사이엔 노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에게

소론의 정치 성향을 지닌 사도세자는 탐탁지 않았다.

노론은 사도세자가 즉위할 시 자신들의 권력을 잃게 될 것이라 염려했다.

좌불안석이 된 노론들은

사도세자의 허물과 병증을 영조에게 과장해 고해바치며,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를 돌이킬 수 없게 벌려놓았고,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노론 집안의 딸이자 사도세자의 비였던

혜경궁 홍씨와 장인 홍봉한도 일조했다.

역사학자들은,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사도세자의 좋은 성품이나,

영특한 면보다 병증이 자세히 기록돼 있고,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과 한보다는 아버지 홍봉한에 대한 변명과,

집안의 몰락에 대한 한이 서술돼 있는 점 등으로 미뤄볼 때

혜경궁 홍씨와 장인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관으로 동조했다고 분석한다.

남달리 영특했고 호방하며 문무를 겸비했던 사도세자,

그는 성군이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지녔었다.

하지만 그 자질을 꽃피워보기도 전에 아버지에게 억눌리고 당쟁에 의해 사라져야만 했다.

그리하여 영조는 아들을 잃었고, 조선은 위대한 왕이 될 인물을 잃었다.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앓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희대의 비극


조선 역사상 사도세자만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세자는 없다.

영조 38년인 1762년,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힌 지 9일 만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아버지가 뒤주에 가둬 아들을 죽게 한 이 사건은 왕실 역사상 전무후무한 비참한 기록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의 광증이 자초한 결과라는 것이 오랜 정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영조실록」에는 사도세자 죽음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천자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했는데,

10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됐고,

대리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병의 증세가 더움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와 환시를 죽이고….'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도 세자가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기술돼 있다.

부왕을 죽이고 싶다는 극언까지 했다며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면서 말이다.

영조의 꾸지람을 들은 사도세자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기록도 있다.

사도세자가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설이 퍼지게 된 것은

「한중록」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는 자신의 광증을 남들에게 토로하기도 했다.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서찰에는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에 달하여 미칠 듯하다'라며

본인이 병을 앓고 있음을 시인했다.

사도세자가 내관과 궁녀들을 매질하며 이유 없이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사도세자의 이런 극악한 행동은 조정 대신들에 의해 영조의 귀에 들어가게 됐고,

분노한 영조는 결국 아들인 사도세자에게 죽음을 명했다.

아버지 영조에 대한 공포심

역사학자들은 사도세자가 광인이 돼버린 데에는

아버지 영조의 지나친 엄격함이 큰 이유가 됐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칭찬과 인정보다는 비난과 비판을 들었던,

사도세자는 점점 더 아버지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하게 됐고,

영조 앞에선 자기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다.

영조는 42세에 얻은 귀한 늦둥이 아들을 왜 그렇게 모질게 대했을까.

영조는 태생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왕이었다.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적통이 아닌,

숙빈 최씨의 소생이라는 점이 약점이었다.

영조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스스로 학문에 더욱 매진했고 노론과 결탁했다.

아들인 사도세자에 대한 교육열도 대단히 높았다.

아버지로서 속으로야 아들에 대한 애정이 왜 없었겠냐마는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칭찬보다는 질책을, 압박을 더 많이 준 아버지였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아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마음이 안타깝게도 잘못 표현돼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아버지 영조의 기대는 점점 더 높아지기만 했고,

이를 따라가지 못하게 된 사도세자는 점점 더 아버지 앞에서 위축돼버린다.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게 되고,

이는 부자 사이에 점점 더 큰 오해의 벽을 쌓게 만든다.

종내에는 광증의 증상 중 하나인 옷을 잘 입지 못하는 의대증도 나타났는데,

정신분석학자들은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있으면,

아버지 영조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무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라 말한다.

아버지를 두려워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진 아들이라니,

참으로 안타까운 대목이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정치적 성향이 달랐다.

영조는 노론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있었지만 사도세자는 소론 세력을 지지했다.

이 또한 부자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사도세자가 집권당인 노론으로부터 배척받게 된 이유가 됐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무예 연습에 열중하는 것도 싫어했다.

이에 대해서는 학문에만 정진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사도세자가 자신을 해하기 위해 무예에 열중한다고 생각해 진노했다는 설도 있다.

사도세자라는 이름은 영조가 아들의 사후에 붙여준 이름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같은 영조의 행동에는 깊은 회한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