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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명의' 화타는 누구? 하늘이 내린 신의(神醫), 화타

월광화 2012. 10. 16. 13:58

 

 

정전 내부에 서있는 화타상.

 

 

 

 

'전설의 명의' 화타는 누구?

 

화타는 동한(東漢)말기인 서기 145년경에 안휘(安徽)성의 박현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는 다름아닌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때이다. 
실제로 나관중은 <삼국지>에서 의성 화타를 적지않은 분량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당시 동한은 북으로는 흉노를 치고 남으로는 황무지를 개간하였고 

서쪽으로는 비단길을 개척하는 등 큰 사업을 벌려 백성들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환관과 외척들이 득세하여 정치적으로도 혼란한 시기였기에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어려지고 있었다. 
화타는 이런 난세에 평범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훗날 
그 어떤 영웅호걸 못지않게 세상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이 된다. 

화타의 자는 원화(元化)이고 어릴 때의 이름은 부(敷)이다. '타'라는 이름은 '가리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해와 달처럼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쌀줄 아는 인물이 되기를 기원하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똥오줌 받으며 병세 파악한 청년 화타

화타가 처음 의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머니 정(程)씨의 병을 치료해준 

박현의 우(禹)의원과 인연을 맺으면서 부터이다. 
화타의 의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자질을 우의원은 단번에 알아보았고 
어린 화타에게 의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타가 본격적으로 의술의 깊이를 더한 것은 산동성 남쪽 서산지방에 있는 

경림사 주지 광제대사(廣濟大使)의 문하에 들어간 이후다. 
광제대사는 당시 산동성의 이름난 명의였다. 
젊은 의원으로 고향 박현에서 가난한 환자를 돌보며 의술을 베풀던 화타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광제대사를 찾는다. 
광제대사 역시 화타의 총명함과 의술에 대한 열정을 어렵지 않게 파악하고 
자신의 절에 기거하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광제대사는 
"나는 너에게 가르칠 의술이라는 것이 없다"고 잘라 말하며, 
화타에게 병석에서 꼼짝도 못하는 중환자들의 똥오줌을 치우는 일을 맡긴다. 

광제대사는 자신의 말처럼 화타에게 단 한번도 의술에 대해 

직접적인 가르침을 전수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화타에게 자신이 환자를 진료하는 동안 곁에 있는 것을 허락했고, 
화타는 광제대사가 환자들을 대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의술을 깨우쳤다. 
또한 화타는 환자들의 똥오줌을 받아내며 환자들의 배설물 
색깔과 냄새만으로 병세를 파악하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이는 광제대사가 환자들의 병세를 파악하는데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화타가 경림사에서 머문 지 6년이 지난 어느날 

광제대사는 화타를 불러 하산을 명한다. 
이후 화타는 광제대사의 가르침에 따라 중원 여기저기를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의술을 펼치며 이름을 떨친다.

*생활 속에서 발견한 가난한 자를 위한 치료법

화타는 뛰어난 탐구정신과 관찰력으로 새로운 치료법을 발견하는데 

열과 성을 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어디에도 약초가 있으니, 
두 손에 의지해야 한다"는 광제대사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즉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하고 값비싼 약초만을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약재들을 응용하는 데 힘을 쏟았던 것이다.

화타가 왕진을 가던 어느 날이었다. 

화타는 강가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괴로워하고 있는 한 아낙네를 발견하였다. 
화타가 다가가 보니 아낙네의 얼굴은 눈 코 입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부어 있었다. 
그 연유를 들어보니 풀을 베다 말벌에 쏘여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 
화타는 아낙네를 진정시키고 그늘진 바위에 있는 이끼를 한 줌 뜯어서 
곱게 빻아 그것을 아낙네의 얼굴에 골고루 붙였다. 
이끼를 붙이자 아낙네는 곧 고통에서 벗어났고 화타에게 머리를 숙여 감사했다. 

아낙네가 화타에게 이끼가 이렇게 훌륭한 보배임을 

어찌 알았는지 묻자 화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지난 여름 뒷마당에서 서늘한 바람을 쐬며 거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말벌이 날아들어 거미줄에 걸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미는 재빠르게 말벌을 거미줄로 감싸기 시작했죠. 
그런데 말벌이 거미의 몸에 침을 찌르자 거미는 비틀거리며 거미줄에서 떨어졌습니다. 
헌데 거미는 그늘진 곳에 있는 이끼 위로 기어가더니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거미는 다시 거미줄로 올라가 말벌을 공격하여 잡아먹었습니다."

화타는 거미의 행동을 보고 이끼의 습한 기운이 벌침이 가진 독의 

화(火)와 상극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몸에 여러 
차례 실험을 해본 뒤 이끼의 효능을 깨달았다는 고사가 전해온다. 

이처럼 화타는 '생활의 발견'을 통해 많은 치료법을 발견했고 

병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 치료법을 널리 알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화타가 황달에 효험이 있는 황쑥을 두고 "삼월에 인진(茵蔯), 사월에는 잡풀"이라고 
구절을 노래로 만들어 널리 알린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염독 태수를 치료한 화타의 욕설

화타는 침구와 약처방에 뛰어난 의사였다. 

특히 침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치료법이었다. 
침을 사용하지 않는 환자는 거의 없었으며, 
반드시 약을 쓰지 않아도 되면 약을 쓰지 않았다. 
절개수술 또한 종양환자가 아니고서는 여간해서 하지 않았다. 
화타는 항상 침구를 먼저 사용했으며 침을 놓아도 매번 신중을 기해 
두 세 개의 혈만을 골라 정성을 다해 놓고 뜸을 놓아도 
두 세 개의 혈을 넘지 않았다. 
중병일 경우 또한 일곱 개의 혈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정작 명의로 빛을 발한 것은 환자의 마음을 읽어내는 

심리요법과 병의 인과관계를 따져 처방하는 관계요법에 능한 의사였기 때문이다. 
금원시대의 명의인 장자화는 의성 화타가 시술한 치료에 있어 
심리요법을 습득하고 깨우쳐 화타의 정신요법을 계승하고 
이후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다. 

화타의 심리요법으로 유명한 고사로는 염독 태수의 병을 치료한 일화가 있다. 

명의로서 이름을 떨치며 강소성의 여기저기를 떠돌던 
화타는 염독(鹽瀆)에 도착했다. 
화타가 염독에 도착한 것을 알고 염독 태수의 관리는 
화타를 찾아와 태수의 병을 치료해달라고 부탁했다. 

관리를 따라 태수를 만난 화타는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병색이 역력한 태수를 볼 수 있었다. 
태수의 얼굴과 몸은 먹고 소화시키지 못한 육기(肉氣)가 
부어 올라 퉁퉁해 있었고 얼굴엔 짜증이 가득해 보였다. 
화타는 한 눈에 태수의 몸에 사기가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태수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병을 당장 고칠 것을 재촉했고, 

화타는 이에 효험이 서서히 나타나는 처방은 지금 당장 할 수 있으나 
효험이 하루만에 나타나는 처방은 숙소에 있는 의서를 참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태수는 화타에게 다음날 아침까지 처방을 가지고 성으로 올 것을 명했고 
화타는 밤을 새우더라도 꼭 처방을 완성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태수의 부하들이 화타의 숙소를 찾자 화타는 사라지고 

태수에게 보내는 처방전만 한 장 있었다. 
처방전에는 다름아닌 태수에 대한 욕설이 담겨있었다. 
격노한 태수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화타에게 욕을 퍼붓다가 결국 피를 토해내고 말았다. 
피를 토해낸 태수는 불현듯 자신의 병이 말끔하게 치료되었음을 깨달았다. 
태수가 토해낸 것은 사기가 뒤엉킨 적담이었던 것이다.

관계요법은 심리요법과 함께 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하는 

화타의 뛰어난 의술은 후에 예방의학이론의 밑거름이 되었다. 
노년의 화타는 모든 병은 오장육부가 서로 주고받는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모두를 치료의 범주에 함께 넣어야 비로소 병이 사라진다고 했다. 

화타가 동양(東楊)에서 중원의 사대부호인 진숙산의 

부인을 치료한 것은 관계요법에 관한 유명한 일화다. 
진숙산은 젖을 떼지 않은 두 살 배기 둘째 아이가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어 걱정이 컸다. 
마침 화타가 동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진숙산은 화타를 집으로 초대했다. 

진숙산의 어린 아들을 진찰한 화타는 

"이 아이는 병은 있으나 병의 원인은 없다"며 
진숙산 부인의 진맥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화타의 예상대로 진숙산의 부인은 병을 앓고 있었고, 
젖을 물린 아이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화타는 진숙산의 부인에게 약을 처방한 뒤 병이 나을 때까지 
절대로 젖을 물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모유를 금하자 아이는 다시 살찌기 시작했고 병세가 사라졌으며, 
진숙산의 부인도 화타가 처방한 약을 먹고 보이지 않는 병을 치료했다. 

병자를 치료하기 전에 관계된 곳을 찾아 먼저 다스리는 

화타의 관계요법은 그 당시로서는 실로 기괴한 의술이었을 것이다. 
노년기의 화타는 박현에서 제자들과 함께 환자들을 돌보고 약초를 캐며 
어수선한 세상에 민초를 돕는 의성(醫聖)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화타에게 붙여진 의성이라는 칭호는 <삼국지>에서 

우번이 손책에게 화타를 추천할 때 "이 사람은 
이 시대의 의성(醫聖)입니다"라고 소개한 데에서 연유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에는 
화타에 관한 많은 일화가 나온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팔에 독화살을 맞은 
관우를 화타가 치료하는 대목이다. 

관우는 조조의 위나라 군사가 점령하고 있던 번성(蕃成)을 

함락하기 위한 전투 중 팔에 독화살을 맞는다.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화타는 
관우의 팔을 진찰한 뒤 뼈에 독이 퍼졌으니 
뼈를 갉아내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말한다. 
마침 자신이 개발한 마비산(麻沸散)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화타는 관우에게 아무런 마취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관우는 오히려 화타가 자신의 팔을 치료하는 동안 
다른 한 팔로 부관과 바둑을 두었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하지만 이 일화의 실제 주인공은 화타가 아닌 

화타의 제자 오보(吳普)라는 기록이 있다.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스승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보는 
촉나라 관우의 상처를 치료했다는 것. 
실제로 관우가 번성을 공격한 것은 
화타가 죽은지 11년이 지난 서기 219년경이라는 기록이 있다.

*조조와의 불화가 야기한 화타의 불운 

하지만 <삼국지>에 묘사된 

야심가 조조와 의성 화타의 불화는 사실이었다. 
화타는 조조로부터 시의관직을 맡으라는 제의를 받기전 
이미 세차례나 입궐의 권유를 물리친 바 있었다. 
화타는 신의(神醫)라 불리는 
춘추전국시대의 편작이 진나라 무왕(武王)의 
어의인 이혜(李醯)의 질투로 인해 살해당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의관 자리를 고사한 더 큰 이유는 자신의 돌보아야 할 많은 
환자들이 항상 자신의 집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의관이라는 직책은 몇몇을 위해 
의술을 썩힐 수 밖에 없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결국 화타는 조조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시의관 자리를 끝까지 거절하여 
소유욕이 강한 조조의 노여움을 샀고 
마침내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건안(建安) 13년, 서기 208년의 일로 화타의 나이는 67세였다. 
화타는 죽기 전 옥중에서 제자들에게 전해줄 
의서를 집필하는데 온 힘을 쏟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쓴 단 한 권의 의서는 간수들이 
조조를 두려워한 나머지 제자들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옥리록(獄吏錄)>에 의하면 

이 정직하고 강직한 노인은 자신의 유작인 의서를 
스스로 태웠는데 그 모습은 단 한점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태연했다고 한다. 
의성 화타를 죽인 조조는 훗날 자신의 
아들 조충(曹沖)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이 
화타를 죽인 것을 목놓아 후회했다.

화타가 남긴 저서는 아쉽게도 단 한 권도 없다. 

그의 의술은 화타가 죽은 후 후대 의학자들이 
그의 의술을 기록하여 전해내려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의 고사가 가장 많이 실린 것은 북송(北宋)시대 도교승이던 
등처중이 쓴 <중장경(中藏經)>과 서진(西晉) 시대의 역사가 
진수(陳壽)가 저술한 <삼국지> <위서> <방기전>이며,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한비자(韓非子)>에도 몇몇 고사가 실려있다.

 

1. 화타(華 ), 그는 누구인가?
(1) 동한의 의학가
동한의 신의
(2) ? - 208년
(3) 자: 원화(元化)
(4) 고향: 패국(沛國) 초( ) 사람
(5) 저술: 마취약의 마비산(麻 散)


[해설] 이 마취약 마비산은

사람을 마취하는 지금의 마취약과 똑같 은데

중국에서 최초로 발명된 마취약이라고 한다.
침구의 오금희(五禽戱)
(6) 저서: 청낭서(靑囊書)

[해설] 화타가 지은 의서를 말한다.

화타는 동한말의 의학자 인데 조조를 위하여

병을 치료하지 않은 죄로 죽음을 당하였 다.


*현존하는《중장경(中藏經)》이란 책은 비록 화타가 지은
것이라 전해 내려오지만 실제로 후세 사람의 위작이다.
2. 화타의 최후
조조가 두통을 않아 화타를 불러 고치게 했는데,

그는 반드시 마취를 시킨 후 도끼로 뇌를 가르고

'풍연(風涎)'을 꺼내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조조는 그가 다신을 죽이려한다고

의심하여 그를 옥에 가두고 죽었다.

*《삼국지·위서·화타전》에 의하면,

화타는 침구에 정통하여 오금희 (五禽戱)를 창조하였다.

후에 조조의 부름을 받고 가서

오로지 그를 위하여 병을 치료하였다.

집이 그리워 돌아갔는데 조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아내 의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아 마침내 옥에 갖혀 죽었다.

3. 화타의 기타 유적
(1)화타묘(華 墓)
위치: 강소성 서주시 고성로 화조묘.

화타가 낙양에서 조조에게 피살된 후,

각지에서 다투어 묘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명 영락 초년 (1403-1424)에 서주지주 양중절이

화조묘의 흙을 가져다가 의관총 을 만들었다.

원래는 돌로 쌓아 만든 무덤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유적지와 청대의 석각이 보존되어 있다.

 

 

 

원화초당에서 휴식 중인 화타.

 

 

 

매표소 바로 앞에 놓인 화타 사당

다섯 동물의 움직임을 기초로 고안했다는 화타의 오금희.

 

 

 

화조암에서 재배중인 약초

 

 

 

숲 속에서 동물의 움직임을 연구하고 있는 화타.

 

 

 

마비산을 연구하는 모습의 화타.

 


위치: 안휘성 박현 투무영가.

일명 화조암이라고도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화타는 이 현의 투무영에 살면서

조항구에 약방을 열고 사람들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그 후 당대와 송대에 화타가 살았 던 곳에 사당을 세웠으나,

후에 전화로 훼손되었다.

그리고 명말 청초에는 사람들이 투무영가 입구에

화조암을 세우고 화타의 신상 을 만들었다.

현재의 암자는 신중국의 건립 이후 중건된 것이며,
지금은 화타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암자는 남향으로 지어졌 으며,

산문은 아치형이고,

문루 위에는 '화조암'이라는 세 글자 가 금색으로 크게 쓰여져 있다.

그리고 정전 안에는 화타의 전신 상이 서 있는데,

그 높이는 2m가 넘고,

 

몸에는 장삼을 입었으며 머리에는 방건을 쓰고,

허리에는 약호로를 매달고 있으며,

발에 는 배 모양의 가죽신을 신고 있다.

또 얼굴에는 미소를 띤 채 앞 쪽을 하고 있다.

정전의 동상과 서상에는 <<화타신방>>과 《화타 신의비전》등의

서적과 기타 여러 가지 자료들이 진열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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