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 망덕사의 선율사 염부 왕래기(望德寺善律師閻浮往來記)
2. 이름이 같아서 죽었다 살아나다.(普州 金在禧還生譚)
3. 묘 속에 든 사람이 살아나다.
4. 왕랑과 그 부인이 함께 살아나다.
5. 지장기도로 문둥병이 낫다.
6. 세조대왕이 문수동자를 친견하다.
7. 문수의 화신이 자장의 아상을 꺾다
8. 진신이 화현하여 거만한 태수를 교화하다.
9. 영지에 나타난 미륵삼존불.
10. 인면창(人面瘡-唐智顯法師)
11. 어머니가 죽어서 개로 태어나다.
12. 소자첨의 삼생인연(蘇子瞻事蹟記)
13. 총령의 화신과 눈 속의 파초
14. 일자무식이 법을 받다.
15. 원효가 촉수루를 마시고 도를 얻다.
16. 서산스님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다.
17. 코구멍 없는 소(鏡虛惺牛)
18. 오후자미(悟後自迷)
19. 용파스님이 물위로 걸어가다.
20. 비래방장(飛來方丈)
1. 망덕사의 선율사 염부 왕래기(望德寺善律師閻浮往來記)
망덕사의 선율스님은 보시받은 돈으로 6백부 반야경을 이루려 하다가
공이 아직 끝나기 전에 갑자기 염라국의 사자에게 잡혀 명부(冥府)에 이르렀다.
“너는 인간 세상에 있을 때에 무슨 일을 하였느냐?”
“빈도(貧道)는 만년에 대품 반야경을 이루려 하다가
공을 아직 이루지 못 하고 왔읍니다.”
명관(冥官)이 명부(冥簿)를 보고,
“너의 수명은 이미 다 되었으나 좋은 소원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서 보전을 준공시켜라.” 하고 곧 놓아 주었다.
선율이 염라국을 등지고 돌아 오는데 한 여자가 나타나 울면서 앞에서 절하였다.
“그대는 누구이관데 그렇게 슬피 우는가?”
“예, 저는 남염부주의 신라 사람인데 우리 부모가 금강사의 논 한마지기를
몰래 받은 일로 죄를 얻어 명부에 잡혀와서 오랫동안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읍니다.
지금 법사께서 고향에 돌아가신다 하기로 간신히 허락을 얻어 여기 부복하였나이다.
원하옵나니 스님께서 고향에 돌아가시거던
우리 부모에게 알리셔서 그 논을 빨리 돌려 주도록 해주십시요.
그리고 제가 세상에 있을때 참기름 병을 상 밑에 묻어 두었고
또 곱게 짠 베를 침구 사이에 감추어 두었으니
부디 스님께서 그 기름을 가져다 부처님 앞에 등불을 켜 주시고
또 그 베를 팔아 경폭(經幅)으로 보태 써 주십시요.
그러면 황천에서도 또한 은혜를 입어
제 고뇌를 거의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의 집은 어디 있는가?”
“사량부(沙粱部) 구원사(久遠寺) 서남쪽 마을에 있읍니다.”
선율은 이 말을 듣고 떠나려 하자 곧 깨어났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선율이 죽은지 벌써 10일이나 되어
남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냈으므로 무덤 속에서 삼일동안이나 외쳤다.
마침 그곳을 지나든 목동이 이 소리를 듣고 절에 가서 알리니
절 스님들이 와서 무덤을 헤치고 그를 꺼내었다.
선율은 앞의 사실을 자세히 말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가니 여자가 죽은지 15년이 지났는데
그 기름과 베만은 또렷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선율이 그 여자가 시킨 대로 그의 부모님에게 말하여
논 한마지기를 절에 내 놓도록 하고,
또 그 기름과 베를 가지고와서
등불을 켜고 경질(經帙)을 삼아 썼다.
그랬더니 어느 날 밤 꿈에 그 여자가 나타났다.
“저는 명부에서 스님을 뵈온 여자입니다.
스님이 기도해 주신 은덕으로 명부의 고통을 벗어나
천상락을 얻게 되었읍니다.” 하고 사라졌다.
이렇게 일이 되자 이 말과 이 일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또 감동해 마지 않으며 육백부 반야경을 이룩하는데
착한 시주가 되어 미구에 경은 곧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은 나라에서 귀중한 보전(寶典)으로 취급하여
국립불교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승사서고에 비치하고
해마다 봄 가을로 그것을 전독(轉讀)하여
나라의 재앙을 물리치고 국리민복을 도모하게 하였다 한다.
‘부럽구나 스님은 뛰어난 인연을 따라 죽은 혼이 되살아 고향으로 왔는데
총명한 여인은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부모의 죄를 경책하여
함께 고를 면하게 하니 인간과 천상에 좋은 뽄이 되리라.’
2. 이름이 같아서 죽었다 살아나다.(普州 金在禧還生譚)
1924년 경남 진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 진주시 비봉동에 사는 38세된 김재희(金在禧)가 있었고
옥봉동에 80세된 김재희(金在禧)가 살고 있었는 데
하룻 저녁에는 38세된 김재희씨 집에
순경처럼 복색을 한 사람이 찾아와, 잠깐 볼 일이 있으니 가자하였다.
김재희가 아무 말 없이 따라가자 얼마쯤 가다가
자동차에 태워 가지고 재판소 비슷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 이미 20여명 되는 죄수가 있는데 모두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한 서기가 나타나 김재희를 찾으므로 안으로 들어가니,
여기는 명부인데 그대의 나이 가 80이 되어 인간 수명이
다 되었기로 잡아온 것이니 조금만 기다리고 있 으면
좋은 자리가 정해질 것이니 안심하고 있으세요. 하였다.
김재희는 꿈 속에서도, ‘나는 금년 38세 밖에 아니되었는데 80이라뇨.
아무래도 잘 못된 것 같으니 다시 한번 조사해 보십시요.’ 하였더니
여러 서기가 모여 다시 호적부를 뒤지다가
잘 못 되었다 하며 데리고 온 순경을 호통치며
김재희 보고는 죄송하다고 하며 건물 밖으로 밀어 내 보냈다.
꿈을 깨고 보니 너무나도 역역하여 시간을 보니 새벽 2시였다.
아침에 일어나 꿈이야기를 하고 녹봉동 김재희씨 집으로 가려 하는데
전날 저녁까지 잘 잡수시고
아무 탈 없던 분이 새벽 3시경에 죽었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살아난 재희가 문상가 이 사실을 이야기하니
모두 가족들이 감격해 하면서
통도사 포교당 법사 박만선(朴萬善)스님을 청하여
불교 의식으로 장례를 지내고 49제까지 잘 지냈다.
3.묘 속에 든 사람이 살아나다.
송나라 순희 원년 양국부 승국에 사는 주홍은 어려서부터 매일 금강경 한 번씩 읽었다.
그런데 어느날 태수 막호에게 바칠 돈 천여관을 가지고 가다가
날이 저물어 과주 욱삼의 집에 투숙하였다.
그런데 욱삼이 형 욱이와 함께 주홍이 가지고 가는
재물이 탐이 나서 주홍을 죽여 5리밖 길가에 묻었다.
태수는 그런줄도 모르고 기한을 어겼다고 대노하니
양주부로 가던 중 과주 길가를 지나가다가
무덤 비슷한 곳에 연꽃 한 줄기가 난 것을 보고,
“고산준령에는 연꽃이 나지 않고
더러운 못 가운데만 연꽃이 난다 하였는데
어인일로 이 연은 무덤 위에 나 있는가?” 하고 그를 꺾으려 하였으나
꺾이지 않으므로 그 곳을 파 보니 주홍의 시체가 나왔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는 조금도 죽은 것 같지 않고
혀에서는 연꽃이 솟아나 있는데 잠시 후에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객점에서 모해를 당하여 십팔개월 동안이나 땅속에 묻혀 있었읍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죽지 않았는가?
배가 고프지 않던가?”
“처음 피살 당하여 혼몽하여 땅에 묻혀 있었는데
금강신장이 연꽃을 입속에 꽂아준 후부터
지금까지 잠을 잤습니다.” 하였다.
태수는,“일찌기 내 금강경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의 공덕이 이렇게 불가사의 할줄은 내 몰랐다.”고 찬탄하고
곧 욱이와 욱삼 두 형제를 잡아서 사형에 처했다.
4. 왕랑과 그 부인이 함께 살아나다.
옛날 함경남도 길주 땅에서 왕사궤라 하는 사람이 살았는데
하루는 2년전에 죽은 부인 송씨가 창밖에 와서 창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보 주무세요. 내 말을 들으세요.”
왕랑은 자다 말고 깜짝 놀라 일어나 창문을 열고 물었다.
“누군데 깊은 밤에 나를 찾읍니까?”
“접니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2년전에 죽은 송씨인데…”
“어인 일로 이 밤중에 찾아왔읍니까?”
“당신에게 꼭 부탁할 말이 있어 왔읍니다.”
“무슨 부탁인데…”
“다른 것이 아니고 제가 죽은지 2년이 되었으나
염부에서 아직 심판을 끝내지 않아 오도 가도 못하고 있읍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명이 이제 내일이면 이생의 삶이 다 하는날이라
내일 아침 다섯 사자가 당신을 잡으러 간다 합니다.
그런데 옛날 당신과 내가 이웃집 안씨 할머니가 염불을 하며
서쪽을 향하여 절하는 것을 비방하며
시끄럽다고 욕설을 퍼붓지 않았읍니까?
그런데 죄가운데는 남의 선행을 방해하는것 같이 큰 죄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오기만 하면 나와 함께 무간지옥으로 보낸다 하니
지금부터 당신은 목욕재계하고 도량을 청소한 뒤
서쪽벽에 ‘나무아미타불’여섯자를 써 붙이고 정성을 다해 염불하세요.
그렇지 않고는 결코 이 죄를 면치 못하겠아오니 부디 부탁합니다.
그럼 가요.” 하고 어디론지 사라졌다.
왕랑은 너무나도 역역하고 소소한 일이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목욕재계한 뒤 도량을 청소하고 향불을 피우고
그의 아내가 부탁한 대로 하였다.
이튿날 아침 날이 훤히 밝으려 하는데
과연 다섯 사람의 사자가 오더니, 자기네끼리 하는 말이,
“말 듣기 하고는 다르군.” 하고 왕랑에게 절을 한다.
“어디서 오신 분이십니까?”
“예, 우리는 염라대왕의 명령을 받고 당신을 잡으러 왔읍니다.
그러나 도량을 정돈하고 염불을 하시고 있으니
함부로 다룰 수가 없읍니다.”하고 어서 가기를 재촉했다.
하는 수 없이 일어서서 그들을 따라가니 염라대왕이 사자를 보고,
“이놈을 꼭꼭 묶어 빨리 잡아오라 하였는데 왜 이리 늦었는가?”
“황공하오나 도량을 청결히 하고 앉아
염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령대로 실행치 못하였읍니다.” 하니
염왕의 태도가 급변,
십대왕이 모두 일어서서 목례를 한다.
“그대 부처가 일찌기 노인 안씨의 염불하는 것을 비방하고
욕설하였기로 먼저 송씨를 잡아왔으나
그대의 수한을 기다려 함께 보내고저 하였는데
사자의 말을 들으니 개심참회하고 지성으로 염불한다니
모든 것을 용서하고 다시 인간으로 보내어
30년을 더 살게 하리라.” 하였다.
옆에 있던 최판관이,
“왕랑은 지금 돌아가면 시신이 있으므로 다시 살아날 수 있지만
송씨는 죽은 지가 오래되어 벌써 시체가 썩어 버렸으니 어찌합니까?” 하니
염라대왕도 매우 난색한 표정을 하였다.
이때 왕랑이 다시 아뢰기를…
“길주 군수의 딸이 지금 이십일세인데
명이 다하여 2일전에 죽은 것을 보고 왔읍니다.
아직 그 시신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니
송씨의 혼령을 그 에게 의탁하면 어떻겠읍니까?”
“거 참 좋은 의견입니다.” 하고 곧 그들을 내 보내면서,
“옆집 안노인은 3년후에 죽어 바로 극락세계로 갈 것이니
부모님 같이 잘 모시고 사시요.” 하였다.
왕랑이 죽은 후 3일만에 깨어나니
길주 군수의 딸도 살아나
그동안 염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군수에게 사루며,
“이 몸은 군수님의 소생이 분명하오나
영혼은 왕랑의 전처 송씨의 혼령이오니 그리로 시집보내 주십시요.”
하니 군수와 부인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면서,
“혼령이야 누가 됐던 이 몸은 우리 부부가 난 것이니
우리들만 잘 모시면 시집은 그대 원과 같이 하리라.”
하고 곧 결혼식을 올려주니
왕랑은 그 뒤 30년을 더 살아 80상수를 하고
부인은 51세가 되도록 아들 딸을 낳고 잘 살다가 한 날 한시에 죽었다.
또 그 옆집 안씨 노인도 왕랑이 되살아난지 3년만에 죽으니
세상에 이런 기적이 없다 하여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5. 지장기도로 문둥병이 낫다.
지금으로부터 138년전(서기 1831)인 근세조선 순조 때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문둥이 때거리가 10여세나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를 하나 데리고
구걸하다가 강원도 철원군 보계산 석대 지장암에 들어왔다.
어린아이도 물론 문둥이였다.
암자의 주지스님이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보, 그 아이는 여기 두고 가시요.
그리고 겨울을 지내고 봄이 되거든 찾아 가시요.
의복도엷은 데다가 병까지 걸려서 달달 떨고 있는 것이 불쌍하구려.”
“그렇게 맡아 주신다면 고맙지요.
데리고 다니는 우리도 귀찮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문둥이 때거리는 어린이를 지장암에 두고 가버렸다.
지인지감이 있는 스님은 소년에게 물었다.
“너의 고향은 어디냐?”
“전라도 고부에요.”
“성명은?”
“성은 정가고 이름은 영기(永奇)입니다.”
“부모님은?”
“부모님은 다 돌아가셔서 시집간 누님에게 가서 있었는데,
못쓸 병이 들어서 그네들에게 발각되어 쫓겨나온 거예요.”
“너의 병을 낫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해보겠느냐?”
“하구 말구요.
이 병은 아주 신세를 망치게 하는 병이라니까요?”
“그러면 네가 결심을 하고 내가 시키는대로 해 보아라.”
주지스님은 영기에게 이렇게 다짐하고
법당에 계신 지장보살께 정수를 떠 다 놓고 절을 하고
지장보살을 생각하며 부르되,
하루 천번씩 부르고 병이 낳게 하여 달라고 축원하라고 일렀다.
지장보살을 모신 법당이 마루법당이 아니고
사람들이 기거숙식을 하는 인법당(人法堂)인 까닭으로
영기는 추워떨지도 않고 지성스럽게 지장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도 그 주지스님을 부모와 같이 고맙게 생각하였다.
이와같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하다가
50일이 될까하는 어느 날 밤에 기도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그 꿈 속에서 어떤 노장스님이 나타나더니
자기를 귀엽게 여기고 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말씀하시기를,
“불쌍한 아이로다.
아무 죄도 없는 것이 부모의 탓으로 못쓸 병이 들었구나.
그래도 네가 과거의 불연이 있어서 여기까지 찾아왔구나.
여기 오기를 잘 했다.” 하며
눈, 코, 귀, 입이 있는 얼굴 전부와
등, 배, 팔, 어깨, 다리 와 수족 전체를 만져 주었다.
그랬더니 몸이 아주 날아갈 것처럼 시원하였다.
“네가 이 병이 났거든 중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면 훌륭한 도승이 될 것이다.
잘 명심하여라. 나는 물러가겠다.”
영기가 깨고 보니 꿈이었다.
그런데 영기가 꿈을 꾸고 난 뒤 부터는
꿈에서와 같이 문둥병이 씻을 듯이 나아 버렸다.
전신에 퍼져 있던 곪아 터지던 부스럼도 간 곳이 없고,
맨승 맨승하게 빠졌든 눈섭도 새까맣게 나고,
까마잡잡하던 살결도 아주 허여 멀겋게 변하여 졌다.
그 전과는 아주 딴 사람이 되어 버렸다.
영기는 자진하여 주지스님께 중이 되겠다고 지원하고 머리를 깎았다.
이 분은 후세에 동방의 율사로 이름이 높은 남호(南湖)대사였다.
스님은 어려서 이러한 체험이 있는 까닭으로 남보다 부지런히 공부하여
경학도 잘 배우고 글씨도 잘 익혔다. 그리하여 명필과 문장을 겸하였다.
그 뒤에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데는 사경(寫經)이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소(疏)를 갖춘 <아미타경>을 쓰는데,
글자 한자를 쓸 때마다 세번 절하고
세번 염불을 하며 <아미타경>을 써서 부처님께 바쳤다.
그 글씨의 목각판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리고 십육관경과 연종보감을 써서
목각하여 양주군 수락산 흥국사에 두었다.
그리고 서울 뚝섬 건너 봉은사에서 8권의 <화엄경>판을 목각하고
판전이라는 법당을 지어 봉안하였다.
이것이 지금도 남아있어 봉은사를 가면 볼수가 있다.
그런데 이 <화엄경>목각판 불사 때에 스님이 여난(女難)을 만난 비화가 있다.
율행이 높은 스님이 양주 흥국사에도 계시고
서울시 화계사에도 계시면서 설법을 하고
<화엄경> 불사의 동참시주를 모으고 계셨던 까닭으로
남녀 신도가 적지 아니 모였다.
더군다나 봉은사에서 경불사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뚝섬강이 메이도록 사람의 왕래가 많았다.
그런데 이 때에 서울에서 사는 어떤 대갓집의
젊은 미망인이 스님에게 돈과 쌀의 시주도 많이 하며
하루 건너씩 나오더니,
스님에게 애정을 호소하고 야릇한 눈치를 보이는 것이었다.
계행이 빙설같은 스님은 본체 만체,
들은체 만체 하고 인간무상과 애욕의 무서움,
지옥의 무서움에 대해서만 설법을 하고 계실 뿐이었다.
그러나 도고마성으로 악연은 참으로 물리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어느 날 밤 이었다.
공사 감독으로 전종일 시달린 스님이 문단속도 없이
조실방에서 깊은 잠이 들었는데 가위에 눌리는 듯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어찌된 일인가 하고 겨우 정신을 차려 눈을 떠 보니
동백기름 냄새가 코를 찌르며
여자의 몸이 자기 가슴에 안기고
부드러운 팔이 목을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숨결을 몰아쉬며 입으로 불기운을 뿜는 것이 아닌가?
스님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소리를 내어 꾸짖어 내어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순수히 욕망을 들어 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스님은 목에 감겼던 팔을 가만히 풀어놓고,
“여보시요, 막중한 불사중에 이게 무슨 짓이요?” 하고 나직한 귓속말로 힐책하였다.
“스님, 죄송합니다. 그러나 사람 하나 살려주십시요.
여자의 몸으로 남자의 방에 뛰어들때는…”
“그러나 당신이 미쳤지 이게 될 뻔한 일이요?”
“미쳤대도 좋아요. 스님에게서 저의 소원만 푼다면 지금 죽어도 좋겠어요.”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중대한 일인만큼 그렇게 경솔하게 하여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이것도 인연소치인 연분이니까,
이경불사를 다 마치고 나서 떳떳하게 부부가 됩시다.
부처님의 말씀을 보면 중으로서
음행을 한다는 것은 가장 큰 죄라고 하셨으니까,
나도 아주 퇴속하여 당신과 백년 해로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까 하니
그리 아시고 이 불사를 마칠 때까지만 기다려 주는 것이 어떻겠소?”
“정말입니까?”
“그럼 정말이지 거짓말을 하겠소, 속인도 아닌 중이…”
“아이구 좋아라. 그러면 더욱 좋지요.”
“그러니까 이 밤에 딴 짓 말고 어서 나가주어요.”
“스님이 그렇게 하여 주신다니 고마와요.
그렇지만 한번만 꼭 껴안아 주셔요.” 하고 그 여자는 달려 들었다.
그것까지 거절할 수가 없어 그 여자가 하는대로 두었더니
으스러질만큼 끌어안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러더니 그 여자는
스님의 뺨과 코와 입에 키스를 퍼붓는 것이었다.
그리고 살며시 일어나 나갔다.
그러한 일이 있은 뒤에 날마다 오다시피 하더니
별안간 발길 이 뚝 끊어지고 보이지를 않았다.
스님은 호사다마를 부르짖으며
부랴부랴 불사를 재촉하여 다 마치고
내일 아침부터 수백명의 스님들과 수천명의 신도가 모여
낙성식 겸 회향재를 다 준비하여 놓았다.
그런데 이 날 밤중에 스님은 자취도 없이 도망을 가고 말았다.
부서를 맡은 스님네가 재는 잘 모셨으나
스님이 없어졌으므로 모두 허탈을 느꼈다.
그 여자도 삿갓 가마를 타고 나왔으나
그토록 깊은 맹서를 하던 스님이 행방불명이 된 것을 알고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 여자는 비관하고 뚝섬강을 건너 오다가
철천의 원한을 품고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뒤 그 여자는 원귀가 되어 스님을 따라다니면서 무척 괴롭혔었다.
언제든지 머리끝에 매달려 두통을 앓게 하고
무슨 불사든지 장난을 일으켜 방해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석대암 지장보살에게 가서
삼,칠일 기도를 하고 천도재를 지내주고서야 무사 하였다.
6. 세조대왕이 문수동자를 친견하다.
세조대왕은 이조 제7대 왕이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어느날 밤 꿈에 형수(문종황후 즉 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
“에이 더러운 인간아,
부귀와 영화가 좋다 한들 어찌 감히 사람이 사람을 죽인단 말이냐?”
하고 얼굴에 침을 뱉았다.
그런데 그 날부터
세조대왕의 몸에는 이름을 알수 없는 종기가 나 백약이 무효였다.
생각다 못한 세조는 금강산에 들어가 기도할 것을 마음 먹었다.
세조가 단발령에 이르니 산색은 청정하여
마치 부처님 몸을 뵈옵는 것 같고 흐르는 내는 청정하여
마치 부처님의 범음성(梵音聲)을 듣는듯 했다.
환희와 선열(仙悅)에 정신을 잃은
세조대왕은 그대로 머리를 깎고 중 될것을 생각하였다.
“여봐라, 거기 이발사를 데려 오너라.
내 머리를 깎고 이대로 중이나 되어야겠다.”
그때 대신 신숙주가 있다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나라일은 누가 수습하며 만조백관은 그누가 거느립니까?
마음을 거두시어 그 마음으로 차라리 불사를 지음이옳은가 하나이다.”
“그렇다면 내 중은 되지 않겠으나 참회의 표시로 윗 머리만 자르리라.”
하고 사방은 그대로 놓아두고 가운데 머리만 빡빡 깎았다.
그리고 일행은 그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 만폭동 마하연으로 가려 하였다.
그런데 난데 없이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감히 죄인이 대승보살의 깨끗한 도량에 참례하려 하느냐?
너는 거기를 가지 못하리라.”
“천만 사람이 다 갈 수 있는데 어찌 저만 홀로 못 간다 하옵니까?”
“너는 조카를 죽인 죄인,
다른 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할수 없이 세조의 일행은 천학봉 아래 이르러 원통암을 찾았다.
세조대왕은 맑은 물에 목욕하고 일주일을 기도하니
꿈에 비로서 마하연의 큰 길이 무지개처럼 나타나 보여
다음날 마하연을 참배하고 다시 양양 낙산사로 떠났다.
낙산사에서는 대종을 시주하고
오대산에 이르러 천일기도를 시작하였다.
오대산은 예로부터 오만진신이 유존(留存)하여
청정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던 곳이다.
상원사에 있으면서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매일 같이 오르내렸다.
어느 날 날씨가 무더워 더욱 몸안의 종기가 불어터지는 것 같았다.
모든 시종들을 물리치고 홀로 시내에 들어가 더러운 부스럼을 씻고 있었다.
그런데 등에는 손이 닿지 않아 씻지 못하고 있는데
그 때 마침 어떤 동자가 길을 지나 가다가,
“등을 문질러 드릴까요?”
하고 소리쳤다.
대왕은 깜짝 놀라며 동자를 바라보고
“마음이 있거든 이리 오너라.”
하였다. 그랬더니 이 아이는 오자마자 대왕의 손이 닿지 않아
씻지 못하고 있던 등을 어떻게나 시원스럽게 잘 문질러 주는지
금방 하늘에라도 날아갈 듯 하였다.
대왕은 하도 고마워서,
“내 오늘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안했으니
내일 사시에 다시 이곳에서 만나자.
그리하면 내 너에게 깊은 보답을 하리라.”
하였다. 그랬더니 동자 가로되,
“그런 것은 걱정마십시요.
다시 만나지 않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럼 얘야, 너 혹 거리에 나가더라도
임금님에 등을 문질러 드렸다는 말은 하지마라.”
“예, 염려마십시요.
그러나 대왕님께서도 개울에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고
누구에게도 말씀하지 마십시요.”하였다.
대왕이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곧 뒤를 돌아보니
머리를 두가닥으로 딴 동자가 금방
나무사이로 사라지는데 찾아 보아야 다시 볼수 없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대왕은 너무나도 신기하여 그 영험한 문수동자를 붓으로 그려 모시게 하고
다시 그것을 조상(造像)으로 하여 모시게 하니
지금 오대산 상원사 큰 방에 모신 문수동자가 그것이다.
세조대왕은 그 날로 모든 병이 완쾌하고 다시는 도지지 않아
그 은혜를 보답코자 뒤에 본궁에 돌아와서는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서를 국역인출 하고
원각사를 짓고 13층 탑을 세워 불멸의 문화사업을 간직하였다.
-거룩타, 불보살의 알 수 없는 힘이여,
죄인의 죄값을 쇠사슬로 다스리지 않고
바른 말 고운 행으로 새 사람을 만든 후에 악창원모(惡瘡怨謨)를
한 손으로 낫게 하고 나라에 불사를 일으켜 영원한 민족의 혼을 창작함이여-
7. 문수의 화신이 자장의 아상을 꺾다
대덕 자장은 본디 진한의 진골 소판 김무림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중요한 벼슬을 지냈으나 뒤를 이을 자식이 없어
삼보께 귀의하여 천부관에게 기도하여 자장을 낳았다.
자장은 품성이 고매하고 문장의 구상이 풍부하여
속세에 물들지 않고 항시 깊은 산 높은 메뿌리를 좋아했다.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깊은 산골에 들어가 멧집을 짓고
가시덤불로 주위를 얽은 뒤 옷을 벗고 머리를들보에 메어 졸면
가시덤불에 몸이 걸리도록 해 놓고
고골관(枯骨觀:이 몸은 죽으면 뼈만 앙상히 남는다는
관, 혹 白骨을 관하는 禪法)을 닦았다.
때마침 조정에서 재상 자리가 비어 왕의 명령으로
여러번 불렀으나 오지 않으므로, “나오지 않으면 베겠다.”하니,
“차라리 하루동안 계율을 지켜 죽더라도
백년동안 계율을 어기고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하므로 할 수 없이 왕이 출가를 허락했다.
인평 3년 병신년,
중국에 들어가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에게 기도하니
꿈 가운데 보살이 이마를 만지며 범어로 된 게(偈)를 일러 주었다.
알지 못하여 근심하고 있는데 이튿날 아침 이상한 스님이 와서 가르쳐 주고,
“비록 만교를 배워도 이 글보다 나을 것이 없다.”하며,
가사와 사리등을 그에게 주고 사라졌다.
자장은 그것을 가지고 정관 17, 계묘년(643) 본국으로 들어와
대국통이 되니 나라의 불법이 비로서 기강이 확립되었다.
승니의 5부에 각기 구학을 증가시키고 반달마다 계율을 풀이했으며
겨울과 봄에는 모아 시험해서
지계(持戒와 범계(犯戒)를 알게 했으며
관원을 두어 이를 유지하게 하였다.
또 순사(巡使)를 보내서 지방의 사찰을 차례로 검사하여
승여의 과실을 징계하고 불경과 불상을 엄중히 정비하여
일정한 법식으로 삼았으므로 한 시대에 불법을 보호함이
마치 공자가 위(衛)로부터 노(魯)에 돌아와
음악을 바로 잡아 아(雅)와 송(頌)이 각기 마땅함을 얻은 것과 같았다.
이 때에 나라안의 사람들로서 계를 받고
불법을 받은 이가 십중팔구가 되었으며
머리깎고 중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날이 날마다 커지듯 하였다.
자장은 양산 영축산에 통도사를 세우고
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을 받들고
또 자기의 옛집을 원영사로 고치고
낙성회를 베풀어 잡화(雜花-화엄경)1만게를 설하니
52류의 여인들이 감동, 현신하여 와서 법을 들었다.
그래서 문인에게 시켜
나무 52그루를 심어 그를 기념하고 일러 지식수라 하였다.
자장은 나라에 건의하여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고
또 대화사를 세워 중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나누어 봉안하고
만년에는 서울을 하직하고 강릉 수다사로 들어갔다.
하루는 꿈을 꾸니 중국 북대에서 본 스님과 같은 분이,
“내일 너를 대송정에서 만나겠다.”하였다.
일찍 나가서 송정에 이르니 과연 문수보살이 와 있었다.
자장이 법요를 물으니 “태백산 갈반지에서 다시 만나자.”하고 곧 사라졌다.
자장이 태백산에서 그를 찾아 헤메다가
큰 구렁이가 나무밑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여기가 갈반지다.”하고
곧 석남원을 세우고 문수대성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늙은 거사가 남루한 방포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메고 와서
시자에게, “자장을 보러왔다.”말했다.
시자가 보고,
“내가 좌우에서 시종한 후로 아직 우리 스승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보지 못했는데 그대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미친 말을 하는가?”
“다만 너의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라.”
시자가 들어가 아뢰니 자장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아마 미친사람인가?”
하니 문인이 꾸짖어 내쫓았다.
거사는 “돌아가겠다. 돌아가겠다.
아상(我相)을 가진자가 어찌 나를 보겠는가.”
하고 곧 삼태기의 사자를 꺼꾸로 털자 곧 사자좌로 변하니
그 위에 올라 앉아 빛을 나투며 가버렸다.
자장은 이 말을 듣고 그제서야 위의를 갖추고
그 빛을 찾아 빨리 남쪽 고개에 올라갔으나
벌써 까마득해서 따라가지 못하고 그 곳에 쓸어져서 세상을 떠났다.
8. 진신이 화현하여 거만한 태수를 교화하다.
경상남도 지리산 쌍계사는
신라 제46대 문성왕 2년에 진감국사가 지은 절이다.
그 절에서 3리쯤 올라가면 칠불암이 있고
그 암자 가운데 아자방(亞字房)이 있다.
이 암자는 신라 제 5대 바사왕 23년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들이
이 곳에 출가하여 불도를 이루었으므로 칠불암이라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암자 가운데 있는 아자방이 유명한 것은
방 자체도 크지만 방의 형상이 버금아자(亞)형식으로 되어
그 높이가 12척이나 되는데 높은 데도 사람이 앉고
낮은 데도 사람이 앉아도 불을 때면 똑 같이 덮기 때문이다.
설계는 담공(曇空)선사가 한 것인데
어떻든 동양 유일의 대선방이었으므로 이름이 더욱 드날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방은 오직 참선방으로만 사용되어 왔으므로
큰 절 쌍계사에서는 물론 한국 각 사찰에서 지극히 수호하는 바 되었다.
그래서 이 방만은 참선하는 사람 이외에는
그 누구도 관람을 허락하지 아니했다.
그런데 이조 중엽 하동군수로 온 사람이 쌍계사에
초도순시차 왔다가
칠불암 아자방을 보고 가겠다 요청했다.
그래서 스님네가
“그 곳은 보시나 마나 볼 것이 없는 곳이 오니 그냥 가도록 하십시요.”
하니 이 군수 굳이 고집하여
“내 여기까지 왔다가
그 유명하다는 칠불암을 보지 않고 간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잠깐 구경하고 가겠노라.”
하여 하는 수 없이 그 일행은 칠불암으로 안내 되었다.
그런데 군수는 또 아자방을 가르키며,
“이 방을 보고 싶으니 좀 열어라.”고 명령했다.
“지금은 공부시간이 되어 열어 보일 수 없읍니다.”
“그러면 언제 보여준단 말인가.”
“이제 막 시작 하였으니 서너시간 기다리셔야 합니다.”
“내가 이 고을 성주인데 성주가 주민을 보기 위해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화가 벌컥 난 군수는 곧 나졸들에게 명령하여 방 문을 열라 하였다.
“죄송한 말씀이오나 조정의 영상도 그러 하였고
본도의 관찰사도 그러하였읍니다.
옛날부터 규정이 그러 하오니 이 방만은 안됩니다.”
하고 한 중이 가로 막았다.
그러나 그 스님은 나졸들에 의해 내 동댕이 쳐지고
방문은 활짝 열려 구경꺼리가 나타났다.
때는 마침 늦은 봄이라 점심공양을 마치고
선방에 들어간 스님들은 오수에한참 몰려 앉은 자세가 엉망진창 이었다.
어떤 스님은 하늘을 쳐다보고 졸고 있고,
어떤 스님은 머리를 푹 숙이고 땅을 들여다보며 졸고 있고,
또 어떤 스님은 몸을 좌우로 흔들고
방구를 풍풍 꾸며 졸고 있었다.
군수는 속으로
‘기껏 공부한다는 사람들의 자세가 이것인가?’
안볼 것을 보았다는 듯
입 맛을 쯥쯥 다시며 가만히 문을 닫고 나서며,
‘요놈들 한번 혼짝을 내 놓아야겠군!’ 하고는 단단히 별렀다.
이렇게 벼르고 고을로 돌아온 군수는
삼일만에 편지 한장을 쌍계사 주지 앞으로 보냈다.
내용은 이러했다.
[네 절에 도인이 많은 듯 하니 나무말(木馬)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동헌마당에서 한번 타고 돌아보라.
만일 목마를 잘 타면 큰 상을 내리겠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큰 벌을 내리리라.]
스님들은 당황했다.
산 말을 타라해도 시원치 못할 터인데
나무 말을 타고 동헌마당을 돌라 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냥 넘길 수도 없는 일,
쌍계사 큰 방에서는 각 암자 스님들과 함께 대중공사가 벌어졌다.
“누가 이 일을 맡아 군수 영감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고
해결을 볼 사람이 없읍니까?”
주지스님이 이렇게 말하였으나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라
대중공사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이때 탁자 밑에서 12,3세가량 된 사미동자 한 사람이 일어서며
“그 일은 제가 맡겠읍니다.
스님들은 아무 걱정 마시고
싸리채나 엮어서 목마나 한마리 만들어 주십시요.”
“네가 무슨 재주로 그렇게 하겠느냐?”
“그건 염려 마십시요.
제가 기필코 신성한 절(聖堂)의 환난을 모면케 하오리다.
설사 그가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일”
스님들은 각오한듯 싸리채를 베어 목마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미는 부목(나무하는 일꾼)에게
목마를 지키고 하동 군청 동헌 마당으로 나갔다.
군수는 어이가 없었다.
“네가 목마를 타려고 가지고 왔느냐?”
“그렇습니다. 소승이 군수님의 소망을 풀어 주려고 가지고 왔습니다.”
너무나도 당당하고 막힌 데가 없는지라.
“그렇다면 내 목마를 타기전에 몇 가지 물어볼 말이 있다.”
“무엇입니까?”
“내가 전날 칠불암에 갔을때 아자방에는 도인들만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도인들의 앉아 있는 폼이 전혀 도인답지 않았다.”
“영감님도 원 별구신(構莘)있는가요”
“그렇다면 하늘을 쳐다보고 졸고만 있는 중은 무슨 공부를 하는 것이지?”
“그것은 앙천성숙관(仰天星宿觀)입니다.”
“앙천성숙관이라니?”
“하늘을 보고 무량한 별들을 관하는 공부입니다.”
“별은 왜?”
“상통천문(上通天文)하고 하달지리(下達地理)해야만
천하만사를 다 알게 되고,
천상에 태어난 중생을 다 제도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럼 머리를 푹 숙이고 땅을 들여다 보고 졸고 앉아 있는 사람은?”
“예, 그것은 지하망명관(地下亡命觀)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죽으면
지하에 지옥으로 들어가 죄를 받기 마련이기 똴은 무슨 공부인가?”
“예, 그것은춘풍양유관(春風揚柳觀)입니다.
공부하는 도승은 유(有)에 집착해도 못 쓰고
무(無)에 집착해도 못 쓰고,
고락 성쇠 그 어느 것에 집착해도 못 쓰기 때문에
버드나무가 바람에 휘날려도 좌우 그 어느 것에도 걸리지 않듯
공유(空有),선악,죄복 보응에 걸리지 않는 관을 하는 공부인 것입니다.”
“그건 그렇다 하고 방구를 풍풍 꾸고 앉아 있는 중은?”
“그건 타파칠통관(打破漆筒觀)입니다.
사람이 무식하여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제 고집대로만 하려는
사또와 같은 칠통배(漆筒輩)를 깨닫게 하는 공부입니다.”
동현에 앉아 있는 여러 조리들을 흘끔 바라보며 무안한듯,
“아직 입에서 젖냄새도 가시지 않은
너의 식견이 이러할진댄 그 곳에 있는 도승들이야 더 말할 것 있겠느냐?
이제 더 물어볼 것 없으니 어서 목마나 한번 타보자.”
사미승은 불끈 일어나서 싸리채로 만든 목마 위에 얼른 올라앉더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말 궁둥이를 내리치며,
“어서 가자 목마야,
미련한 터주대감의 칠통같은 마음을 확 쓸어 버리고
태양같은 밝은 빛이 그 안에도 비치게 하자.”
하고 발을 한번 내 구르니 목마가 터벅터벅 동헌 마당을 5,6회나 돌더니
둥실둥실 공중으로 떠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군수와 육방관속들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리고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로부터 군수는 발심하여 불교를 독신하고
또 쌍계사와 아자방을 살아있는 부처님 모시듯 살피니
하동 군민이 다 그리하여 일시에 하동은
불(佛)바다를 이루고 화장세계를 제현하였다 한다.
9. 영지에 나타난 미륵삼존불.
백제 무왕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와 염문이 있었던
명군으로 역대 제왕 가운데 가장 로맨틱한 설화를 남긴 임금이기도 하다.
그의 어머니는 일찍 과부가 되어 백제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외로히 살고 있 었는데 하루는 그 못 가운데에 사는
용이 그를 사모하여 몸을 변화하여 나 타나
그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장(璋)이라 하였다.
그는 어려 서부터 늘 마를 캐어 팔아 생활을 영위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보고 마를 캐는 아이, 즉 서동(薯童)이라 불렀다.
그는 매우 재기(才器)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는데
신라 진평왕의 세째딸 선화공주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 경주를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주고 사귀었다.
그리고 그 애들에게 이런 노래를 가르쳤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얼려(정을 통한다는 뜻)두고
서동방(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이런 동요가 서울 장안에 퍼지자 대궐 안에서는 야단이 났다.
“대왕마마, 지금 거리에서는
선화공주와 서동이란 아이가 정을 통해 밤마다 만난다 하옵니다.
한나라 임금님의 딸로서 그럴 수가 있읍니까?”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
“장안의 동남 동녀들로부터 선남선녀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화공주를 불러다 문의해본 대왕은,
“그러한 일이 없다” 부인하였다.
“그러시다면 대왕님께서 오늘이라도 거리에 나가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들어 보십시요.”
대왕은 밤이 되자 변복을 하고 거리로 나왔다.
달은 휘영청 밝은데 애들은 둘씩 짝을 지어 다니면서,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얼려 두고 서동방을 밤에 안고 간다네.]
하고 노래 불렀다.
대왕은 기절초풍을 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서야 어찌 그녀를 궁안에 두고 출가 시킬 수가 없었다.
공주는 꽃과 같이 아름다웠다.
솜털 같이 희고, 수정같이 맑은 몸매,
보는 자는 누구고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소문난 여인,
자칫 그대로 두었다가는 나라와 백성을 함께 욕되게 할 여인이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였던 딸이지만
하는 수 없이 아버지 진평왕은 사람을 불러 명령했다.
“저 아이를 밖으로 내어보내라.
그리고 누구도 그를 보호하지 말라.”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곧 그를 가마에 태우고
궁을 나와 옷을 갈아 입히고 평민과 같이 꾸며 거리에로 나왔다.
어머니께서 싸주신 순금 한 말을 머리에 이고
거리로 나선 공주는 막상 가려해도 갈 곳이 없었다.
이리 갈까 망서리고 있는 그때 서동이 나타나 일렀다.
“어디를 가는 여인인지는 몰라도 제가 따라 모시겠읍니다.”
모양은 허술하나 본 바탕이 준수해
별로 그 성의를 저바리고 싶지 않았다.
공주가 말했다.
“남녀의 유별이 엄연한 이 세상이지만
내 갈 곳이 없으니 원하신다면 굳이 사양하지 않겠읍니다.”
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여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 백제땅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러날 산 숲, 들 가운데서 동침을 하여
피를 섞고 정을 통하였므로 비로서 성명을 밝히니
공주는 그 사람이 바로 서동이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고
또한 동요의 영검함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여자가 순금을 내 놓으며,
“이것은 어머니께서 주신 보물로 평생의 부를 누릴만한 재화입니다.”
하였더니
“그런 것은 내가 옛날 마를 파던 산에
언덕과 같이 쌓여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위로하였다.
공주가 말을 듣고 함께 그곳에 이르니 과연 황금이 언덕과 같이 쌓여 있었다.
서동의 손으로 금을 파서 한 노적을 이루니 공주가,
“이 것은 참으로 천하에 진귀한 보물입니다.
당신이 지금 허락하신다면 저는 그것의 일부를
내 부모님께 보내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서동은 곧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에게 찾아가
이 소식을 아뢰니 법사는 곧 불가사의한 법력으로
그것을 신라에 옮겨 그들의 소식을 함께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진평왕은
“비록 나라안 사람은 아니나
그의 총명예지에 고개를 숙이며
그의 사랑에 감사한다.”고 안부하였다.
이 소문이 나라 안(백제)에 퍼지자 나라안에선
그를 모셔 곧 왕으로 추대하고 왕 이름을 무왕이라 하였다.
무왕이 하루는 그의 부인 선화와 함께 수레를 타고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을 향해 달리는데 뜻밖에
용화산 밑 큰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다.
둘이 함께 내려 부처님께 경배하니, 선화 가로되,
“이곳은 보통 영지가 아닙니다
허락하신다면 이 곳에 큰 절을 지어
뭇 중생 의 의지처가 되게 하겠나이다.”하였다.
왕이 발원하여 그 곳에 절을 지으니 지명법사가 지도하고
백제 백성들이 함께 일하였다.
국가에서는 이 절을 왕이 세웠다 하여 왕흥사라 이르나
미륵과 관계 있으므로 미륵사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절은 지금 전라북도 익산군 용화산에 있는 미륵사가 그것이다.
거기에는 유명한 돌탑이 있다.
10.인면창(人面瘡-唐智顯法師)
중국 당나라 때 지현이란 중이 있었다.
그는 계행이 청정하고 정혜를 남달리 닦아서 대중 가운데 뛰어났다.
항상 마음이 자비하여 화를 내지 아니하므로
대중 스님들은 그를 추천하여 간병일을 보게 하였다.
간병이란 환자를 간호하는 직무이다.
하루는 어디서 성질이 포악하고 인물이 괴상한 환자가 왔는데
시키는 대로 듣지 아니하면 마구 때리고 야단을 쳤다.
몸에는 문둥병이 만성이 되어 사방이 곪아 터지고
피와 고름이 흘러서 코를 두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옆에 불러 앉혀 놓고 떠나지를 못하게 하였다.
지현은 생각하기를 이 사람의 병이 만성이 되어
신경질을 더욱 부리니 내 그를 더욱 어여삐 여기고
어떻게든지 낫도록 해주어야겠다 하고
더욱 멀고 가까운데를 가리지 않고 약만 있다면 가서 구해왔다.
때로는 밥을 짓고, 죽을 쑤고, 약을 다리고 하여
그에게 갔다 바치면 이 노장은 밥 그릇을 팽개치기도 하고
죽 그릇을 내 던지기도 하며,
또 약이 쓰다고 짜증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현은 그런 뜨거운 죽 그릇이나 밥 그릇을 뒤집어 쓰고도
화 한번 내지 않고 극진히 간호하였는데 그 간호의 덕택으로였던지
그렇게 중한 문둥병이 3개월만에 완치되었다.
그도 사람인지라 떠나는 마당에 있어서는 지현을 극구 칭찬하였다.
“가히 현세의 보살이다.
복을 짓는 가운데는 간병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데
네가지 정성으로 간호하여 내 병이 이렇게 낳았으니,
네 나이 4십이 되면 나라의 국사로 뽑혀
천하의 존경을 받으리라.
만일 그때 천하 제일의 음식을 먹고
천하제일의 의복을 입어 황제와 나란히 봉연을 타고 돌아 다닌다고
마음에 허영을 놓지 아니하면 크게 고통받는 일이 있으리라.
그 때에는 꼭 나를 찾아야 할 것이니 잊지 말아라.”하였다.
그러나 지현은,
“스님은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나라의 국사는 다 무엇이며
천하일미가 무슨 상관이 있겠읍니까?
오욕을 버리고 출가수도 하는 것은
견성 성불을 하여 무량중생을 제도코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니
설사 그러한 지위가 나에게 부여된다 하더라도
초근목과(草根木果)와 현순 백결(顯順白潔)의 누더기를 떠나지 않겠읍니다.”
“허어, 그 사람 장담은… 이제 두고 보면 알게 아닌가.”
“그렇다면 스님,
스님이 계신곳을 가르쳐 주셔야 알아야 찾아가지 않겠읍니까?”
“그렇다.
참 나도 망령이로구나,
나는 다룡산 두 소나무 아래 영지옆 에서 산다.
그리로 오면 만날 수 있다.”
“감사합니다.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꼭 찾아 뵙겠아오니 부디 버리지 마십시요.”
“그런 것은 걱정말고 너무 늦지 않게 하여라.”
이렇게 다짐한 노장과 지현은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과연 그는 사십세가 되었을 때 국사가 되었다.
나라에서는 훌륭한 도인을 찾아 나라의 스승으로 모시고자
천하총림에 조서를 내렸는데 이구동성으로
지현스님을 추천하니 그가 결국 국사 자리에 앉게 되었다.
지현대사는 몇번이나 사양을 하고
거절하였으나 그는 어찌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왕명을 받고
오달조사(悟達祖師)라는 호를 받으니
금빛 찬란한 비단장삼에 금란 가사가 몸에 둘러지고
천하에 제일가는 음식이 입을 떠나지 않고
천하 인민이 부러워 하는 만조백관이
그의 앞에서는 꼼짝 달싹도 못하고,
또 왕은 항상 그를 자기와 똑 같은 봉연에 태우고
정치를 자문하니 세상에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었다.
오달조사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깨가 으쓱해 졌다.
그래서 지난날의 계행은 간 곳이 없고
사십여년동안 길들여온 오후불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이상하게도 넓적다리가 쓰리고 아팠다.
만져보니 난데 없는 혹이 하나 났는데
시시각각으로 커져 사람의 머리만 하였다.
그런데 이상스런 것은 그 혹에는
머리도 나고 코도 있고 눈도 생겨 필시 사람의 얼굴과 꼭 같았다.
걸음을 걸으면 쓰리고 아파
견딜수가 없으므로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 졌다.
일국의 국사로서 항상 자비의 상호를 떠나지 않았으므로
그가 국사에 추대된 것인데 국사가 되어 얼굴을 찌푸리고
험상궂은 상호로 만조백관을 대하게 되니
세상에 그 보다 더 괴롭고 아픈 일을 없었다.
좋다는 약은 다 써 보아도 낫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이상하게도 그 아픈 곳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밤중이 되어 가만히 옷을 벗고 들여다 보니
어쩌면 그렇게도 사람의 얼굴과 같은 창(瘡)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인면창(人面瘡)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인면창이 하루는 말을했다.
“오달아 너만 그 좋은 음식을 먹지 말고 나도 좀 다오.
그리고 걸음을 걸을 때는 제 발 조심조심 걸어 나를 좀 아프지 않게 해다오.
네가 다리를 절둑거리지 않을려고 억지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나는 얼굴이 씻겨 아파 견딜수가 없구나.”하였다.
오달은 깜짝 놀랐다
“네가 도대체 누구인데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냐?
도대체 말이나 해 보아라.”
그러나 그는 입을 꼭 다물고 말하지 안했다.
오달조사는 왈칵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창피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명색이 한 나라의 국사로서 이러한 병을 가졌다면
얼마나 추잡하고 창피스런 일인가,
오달은 금시 부귀도 영화도 다 싫어지고
임금님을 대하는 것도 만조백관을 대하는 것도,
천하총림의 대덕들을 대하는 것도
다 싫어지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어느날 밤 몇년전에 일러 주시고 가던 그 노장 스님이 생각났다.
[네 나이 사십이 되면 나라의 국사로 뽑혀
천하의 존경을 받고 천하제일의 음식을 먹고
천하제일의 의복을 입어 황제와 나란히 봉연을 타고 다니리라.
그러나 마음에 허영을 놓지 아니하면 크게 고통받는 일이 있으리니
그 때는 마땅히 나를 찾아오라.
나는 다룡산 두 소나무 아래 영지 옆에 산다.]
이 말이 생각이 나 오달조사는
부귀고 영화고 다 팽개치고 야반도주를 기도 하였다.
다룡산 두 소나무 사이에 이르니 안개가 자욱히 끼었는데
어디서 이상한 풍경 소리가 들렸다.
가서 보니 한간 정자에 바로 그때 그 노장이 앉아,
“오늘 네 올것을 기다리고 있었노라.”
“스님, 이것 좀, 이것 좀 고쳐 주십시요.
이 놈이 나를 잡아 먹으려 합니다.”
“그래, 내 이르지 않았더냐! 그런데,
너는 설사 국사가 된다 하더라도
초근목과와 현순백결의 누더기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었지,
그것은 바로 너의 원수다.
어서 저 영지로 내려가 말끔히 씻어 버려라.”
그 노장의 이 같은 말을 듣고 오달조사가
영지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자 인명창이 일러 가로되,
“잠깐, 오달아!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좀 있다.”
“무슨 말이냐?”
“네가 나를 알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알 수 있겠느냐?”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를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옛날 한 나라 경제(景帝)때 재상 착오(錯誤)다.
네가 오나라의 재상인 원익(袁益)으로 있을때
우리나라의 사신으로 왔다가 무슨 오해를 가졌던지
경제 임금께 참소하여 나를 무고히 죽게 하였다.
그런데 네가 세세생생에 중이 되어 계행을 청정히지니고
마음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좀체 틈을 얻지 못하였더니
마침 네가 국사가 되어 계행이 해이해지고
수도에 구멍이 나 모든 선신이 너를 버리고 떠나가는 바람에
내 너를 괴롭히려고 인면창으로 변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너는 불심이 장하여
많은 사람을 구제해 온 까닭으로
오늘 저 스님의 은혜를 입어 병을 낮게 되었으니
이 못은 해관수(解寬水)라는 신천(神泉)으로
한번 씻으면 만병이 통치되고
묵은 원한이 함께 풀어지는 까닭이다.
저 스님은 말세에 화주로 다룡산에 계시는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니라.
이러한 성현의 가피를 입어 너와 내가 세세에 원수를 풀고
참 도를 구해 나아가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냐. 그럼 잘 있거라!”
하고 그 인면창은 감쪽같이 스며 들었다.
오달국사는 그 동안에 해이된 계행,
거만한 마음을 참회하고
그 물에 목욕하니 병은 간 곳이 없고
몸은 날아갈듯 신천지를 얻은 것 같았다.
해관수에서 나와 아까 만났던 빈두로 존자를 뵙고자
그 곳을 찾았더니 소나무는 여전한데
정자와 사람은 간 곳이 없었다.
과연 성현의 영적임에 분명 했다.
오달조사는 이로부터 곧 나라에 사표를 쓰고
그 곳에 안주하여 자비수참(慈悲水懺)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히 행하니
만수행인(萬修行人)에본이 되고 시방제불의 찬탄한 바 되었다.
11. 어머니가 죽어서 개로 태어나다.
경북 금릉군 옴팍 마을에 김갑용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편모슬하에서 4,5남매가 살다가 여자들은 다 출가하고
남동생 하나와 머슴, 그리고 두명의 자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1904년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서 비통한 가운데
장사를 잘 치러드렸는데 그로부터 얼마 안 있다가
그 집 암개가 새끼를 배더니 석달만에 강아지 네마리를 낳았다.
그런데 그 가운데도 유독 한 마리가 복실복실 잘 생겨
집안 사람은 물론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았는데
하루는 갑용의 친구가 와서,
“그 놈 참 잘 생겼다.
귀를 세워 사냥개로 팔면 돈을 많이 받을텐데!”하였다.
그래 갑용은 귀가 솔깃하여 귀를 째어 세우고자
그를 시켜 귀를 째려 하니까 강아지가 낑낑 거리더니
갑자기 멀리 도망쳐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성사를 하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날 밤 갑용의 꿈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나 꾸짖기를,
“이 놈아 그렇게도 눈이 없느냐?
네가 귀를 째려하던 강아지가 바로 네 어미다.
내가 너희집 강아지로 태어난 것은,
너는 그대로 가난하지 않게 밥을 먹고 살지만
네 출가한 동생들이 남편을 잘 만나지 못해 가난하므로
네 몰래 쌀 옷감을 빼내 주었더니
이것이 너에게 큰 빚을 지게 되어 너희 집 도둑을 지키는 개로 태어났다.
그런데 너는 그것도 모르고 귀를 째려 하느냐?” 하였다.
소스라쳐 깬 갑용은 이튿날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더니,
“나도 그와 비슷한 꿈을 꾸었읍니다.
너의 남편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귀를 째려하니 부디 네가 말려 그러지 못하게 하라.”
하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튿날 부터 갑용 내외는
그 강아지를 특별히 대우하기로 하고 쌀밥을 지어 고기국에 말아서
마루위에 올려놓고 ‘오요요 오요요…’하고 강아지를 불렀더니
강아지가 멀거니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기만 하고 얼른 나와서 먹지 않했다.
그래서 이상히 여겼는데 또 그날 밤 꿈에 나타나,
“네 이놈, 내가 네의 어미라고 떡 먹듯이 일렀는데
‘오요요 오요요’가 무엇이냐?
너는 필연코 이 어미가 강아지로만 보인단 말이냐?
이놈 다시 그런 짓을 했 다가는 너의 집에 큰 풍파를 일어나게 할 것이니 정신차려라.”
하고 사라졌다.
갑용은 꿈이지만 너무도 황송하여
이튿날에는 밥과 고기를 해놓고 강아지더러,
“어머님, 어머님, 어서 노여움을 푸시고 진지 드십시요.
소자가 잘 몰라서 불효를 저질렀읍니다.”
하니 그때서야 꼬리치고 와서 잘 먹고 재롱을 피웠다.
그 후 3일째 되는날 또 갑용은 꿈을 꾸니 여전히 어머니가 나타나,
“기특하다.
과연 네가 나의 아들이다.
네가 이 어미말을 명심하고 효성을 다하니 고맙다.
그런데 이제 너에게 몇 가지 부탁할 말이 있으니 꼭 들어 다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경부선 철도가 생긴지 몇해 되어도
일에 골몰하여 한번도 타보지 못해 한이되니
네가 나를 데리고 가서 기차를 한 번 태워줄 것이고,
또 하나는 나와 같이 살던 다른 노파들은
모두 합천 해인사를 구경가서 [팔만대장경]을 친견하고 왔는데
나는 그 때 너의 아버지가 반대하여 가보지 못한 것이 천추에 한이 되니
해인사를 구경시켜 줄 것이고,
또 마지막 하나는 사람이 죽으면 49제를 지내주어야만
모든 죄를 사하고 극락세계로 간다는데 나는 49제를 지내주지 않아서
너희 집에 개가 된 듯 하니 이미 죽은지 오래되어 49재는 못지내더라도
소상은 아직 지나가지 아니하였으니
그날 밤 집에서 제사를 지내지 말고 절에 가서 재를 지내주면 좋겠다.”
꿈이 하도 역력하여
갑용은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이튿날 강아지를 데리고 김천역으로 나가 영동까지 차표를 샀더니
역무원이 열 차에는 개를 데리고 탈 수 없으니 데리고 가라고 힐책하였다.
갑용과 승무원니 이렇게 서로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강아지가 객차안으로 날쌔게 뛰어 올라가더니 주위를 살피고
의자위에 올라가서 않아보기도 하드니
열차가 출발하자 껑충 뛰어내려 왔다.
갑용은 역무원에게 사과하고 강아지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 뒤 갑용은 강아지를 데리고 해인사를 가니
강아지가 산천풍경을 살피며 여간 좋아하지 않았다.
강아지는 대웅전에 계시는 부처님전에
넢죽 엎드려서 절을하는 시늉도하면서 돌아다녔다.
주위 도량을 구경하고 장경각을 참배하려 하니
그 곳을 지키고 있던 스님이
사람은 들어올 수 있어도 짐승은 절대 안된다고 힐책하였다.
갑용이 거북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때,
장경각 문이 훌떡 열리자 강아지가 날쌔게 들어갔다.
다급한 갑용은 강아지를 잡으려고하자
강아지는 장경각 안을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장경판을 모조리 구경하고 나왔다.
이때 장경각 지키는 책임자 정홍원이란 스님이
그모습을 지켜보고는 갑용을 나무라듯이 물었다.
“차림새로 보아하니 당신은 상주인것 같은데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체통이 서지 않거늘
짐승을 데리고 남의 신성한 장경각에 들어온 것도 허물이 되거늘
장경각에까지 들어갔으니,
어떻게 그런 짓을 상주가 된 몸으로 할 수 있단 말이요.”
갑용은 할 수 없이 그동안 사정을 모두 털어놓고
꿈 이야기를 하면서 스님에게 시주금을 그리며 간청을했다.
“내일이 저의 어머니 소상날이온데,
어머님의 말씀에 따라 절에서 재를 모시고자 하옵니다.
어머님을 천도하여 주십시요.”
정홍원 스님이 사중에 이 일을 이야기하자,
도리혀 그의 효성을 칭찬하고
여러 스님들과 함께 재를 잘 지내 주었다.
그러자 그 강아지는 그날 밤 절마루 밑에서 자다가
그대로 죽었는데 갑용과 다른 스님들 꿈에 나타나 노고를 치하했다.
“나는 아들과 여러 스님들 덕택으로
천상락(天上樂)을 받게 되었으니 그은혜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의 몸을 마루 밑에 버려 두고 가오니
화장을 해 주시오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이틀날, 아들과 대중스님들은 마루 밑에서
강아지 시체를 거두어 다비식(茶毘式)의 예로써 화장을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천하에 총림에 뒤덮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12. 소자첨의 삼생인연(蘇子瞻事蹟記)
옛날 중국 쌍림에 한 절이 있었는데 거기에 오계승이라고 하는
스님과 칠계승이라 하는 두 스님(사형/사제간)이 공부하고 있었다.
하루는 칠계승이 하는 일이 없어 도제(徒弟)한 사람과 함께
세상에 나갔다가 삼차로구(三叉路區)라 하는데 이르러
한 유아가 엎드러져 우는 것을 보았다.
칠계승이 도제를 시켜, 가 보아
여아이면 그대로 두고 남아이면 데리고 오라하였다.
그런데 가 보니 그 애는 여자였다.
그대로 놓아 두니 더욱 울음소리가 기박하여 하는 수 없이 데리고 오다가
어느 다방에 이르러 다방 주인에게 은 몇냥을 주고 그 어린애를 맡겼다.
그 후 십육년, 칠계승이 또 하산하게 되어
삼차로에 이르렀다가 홀연히 그 아이 생각이 나
다방에 들렀더니 아이는 사뭇 장성하여 봄꽃 가을 달과 같이 아름다웠다.
주인 응윤에게,
“이름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벽연(碧蓮)이라 합니다.”
“과연 벽연처럼 아름답군요.”
“뜻이 있으시다면 내 안내하겠읍니다.”
“그럼 오늘 일과가 끝나면 그를 데리고 내 방 뒷문으로 들어 오시요.”
하고 칠계승은 돈 몇 냥을 응윤에게 주었다.
응윤은 밤이 깊어 벽연을 아름답게 단장시키고 그 절로 찾아갔다.
과연 칠계승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로 인해 칠계승은 계를 범하고
육계월이 넘도록 벽연과 함께 사정을 통했다.
그런데 하루는 사형 오계승이 좌선을 하다가 정중(定中)에서
칠계승이 벽연과 함께 부정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곧 시자에게 다과를 준비하게 하고 사숙(師叔)칠계승을 불러오라 하였다.
때가 8월 한가위 날이라 칠계승은 시자의 안내를 받고
아무 의심없이 사형방에 들어갔다.
“한 집에 산지는 오래지만 피차 수행에 전념하다 보니
만나기가 어려워 오늘은 내가 특별히 청했오.”
“감사합니다. 사형님”
이렇게 인사가 끝난 뒤 그들은 다과를 들면서
그동안 수도생활에 장애됐던 일과
진취득과한 일들을 주고 받다가 오계승이,
“오늘은 연 꽃을 시제로 하여 한번 지어보세.”
“좋습니다. 그럼 형님께서 먼저 지어 보십시요.”
“아니야, 오늘은 내가 자네를 청해 먹으니 시는 자네가 먼저 짓게.”
그래서 칠계승이 먼저 시를 짓게 되었다.
[햇빛이 붉은 노을에 비치니 못 가운데 가득 차는구나.
가을 바람을 가득 머금고 얼마나 오래 지냈는가?
한 가지에 비켜 누우니 물방울이 후두둑는데
만자의 꽃다움을 주는 것은 홍연의 향기구나.]
하고 지으니 다음은 오계승이 지었다.
[달이 푸른 노을에 비치니 못 가운데 두루하고
가을을 맞이하여 밤이슬에 젖은 것이 얼마이던가?
가을 달속에서 어린 다잎 익히는 것을 구경하니
벽연이 홍연의 향기를 이기는구나.]
칠계승이 듣고 사형 오계승이 자기의 부정한 일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 낮을 붉히며 나와 자기방으로 돌아와 응윤을 부르고,
“내가 벽연에게 정을 둔 일을 사형이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요. 내 은전 몇 냥을 더 줄터이니
벽연을 집으로 데리고 가 자유롭게 살게하고
다시 나의 생각을 하지말라 하여 주십시요.”
하니 응윤은 쾌히 승락하고
벽연과 함께 돈을 받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칠계승은 그날밤,
[내 나이 사십칠세 만사가 하나로 돌아가니
단지 생각함의 차이라 오늘 아침에 급히 가노라.
깨달은 스님을 대하여 어찌 수고롭게 구걸하겠는가,
허황한 소리 번개불 같으니 옛을 의지하여 충천에 숨으리라.]
하는 시를 지어탁자위에 올려놓고 벽에 기대여 그대로 죽었다.
다음날 도제가 이것을 보고 오계승에게 알리니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뒤 수개월이 지나서 하루는 오계승이 도제더러,
“무위승(無爲僧)이 할 일 없으니 세상 구경이나 하여보자”
하고 같이 나가자 하였다. 오계승이 사방으로 유람하다가
하루는 한 촌락에 이르렀을 때
흰 장닭 한 마리가 꼬꼬댁 거리며 따라왔다.
“가련하다 칠계승아,
벽연에 반년 뿌린 인연이 오늘 백계(白鷄)의 몸을 받게 하였구나!”
한탄하고 곧 주인을 찾아가,
“이 닭은 먹여도 이익이 없으니 나에게 팔면
절에 가지고 가서 시간가는 줄이나 알게 하겠오.”
하니 쾌히 승락했다.
오계승은 도제에게,“이 닭을 안고 사중에 들어가
왼쪽 눈을 빼어 버리고 오른쪽 다리를 꺾어 버린뒤
닭장에 넣어 절문 입구에 두고
아침 저녁으로 스님들의 경읽는 소리를 듣게 하라.” 하였다.
도제가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그 닭은 곧 스님의 수기를 받고 죽어
소주 소가(蘇家)의 집에 태어나
호를 동파라하고 이름을 자첨이라 하였다.
오계승이 비로소 안심하고,
“사제가 이제 사람 몸을 받았으니 나도 죽어 몸을 바꾸리라.”
하고 곧 앉아서죽어 소주 진가의 집에 태어나 이름을 단향이라 하였다.
십육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의 벼슬에 오르더니
사월 팔일 부처님 탄일에
호악사 스님을 만나 출가하여 불인(佛印)이라 법명을 얻었다.
한편 소동파는 십팔세에 이르러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가다가 한 중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것을 보고,
“스님은 출가한 사람으로 마땅히 재계를 해야할 것인데
어찌하여 술을 마시고 주먹을 휘두르십니까?”
하니 스님은 도리혀 화를 내면서,
“너는 네 할 이리나 할 것이지
네 일도 다 못 보는 놈이남의 일에 무슨 참견이냐?”
하며 큰 소리를 쳤다.
소동파는,
“내가 만일 과거에 급제하면
마땅히 승도들을 국법으로 다스려 성안 출입을 금하리라.”
맹세하고 서울로 올라가 대과에 급제했다.
하루는 한림학사 왕안석이 화정에 내려 왔다가,
어젯밤 서풍이 꽃 밭을 지나니
바람에 떨어진 누른 꽃이 땅에 가득차 황금색이다.
하는 시를 지었는데
밖에 손님이 왔다 하여 나가보니 나이어린 동파였다.
맞아 접대하여 보냈는데 가고 난 뒤에 보니,
가을 꽃을 봄 꽃 지는데 비길 것인가?
시인에게 분부하노니 자세히읊어 보아라.
책상 위에 이러한 글이 쓰여 있었다.
어린 놈이 법도가 전혀없군.
하고 이튿날 임금님께 이 이야기를 하여
곧 소주 자사로 좌천시켜 버렸다.
동파는 자사로 부임하자 마자 전날 술집의 스님이 생각나
승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엄중히 고시했다.
[엄중히 백성에게 시달한다.
이 곳을 살펴보니 승도가 많이 출입하여
민심을 미혹하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화주하여 막행막식하니
지금부터 출입을 보고도 관가에 알리지 않는 자가 있으면 같은 벌을 적용한다.]
하였다.
호악사 불인선사가 이 소문을 듣고 소주거리에 내려와,
“소승이 걸음을 옮겨 산을 나오니
백 걸음에 한 걸음도 편치 못한 것이
마치 산 언덕 돌길 같으니
다만 광고를 보고 그냥 지나갈 수 없도다.“
하고 성문앞에 앉았으니 수문장이 보고,
무슨 일로 오셨읍니까?
“그대의 상전을 만나러 왔노라.
안에 들어가 시 잘하는 중이 문밖에서 기다린다.일러라.” 하니
호악사란 제목으로 시를 지어오라 합니다.
그래, 그러면 지어야지
하고 곧 스님은 붓을 들고,
[호악사 늙은 중이 뿌리 없는 나무를 알려고
능히 하늘의 달을 취하고 바다밑에 등불을켠다.
남산 호랑이도 잡고 북해의 용도 잡으며,
머리 가운데 옥선이 있어 한 가지도 못하는 것이 없다.]
동파가 글을 보고 들어오기를 허락하였다. 동파가 시를 지어 이르되,
[강물이 넘치는데 위가 끊기지 않고
다만 물이 떨어져 동으로 흘러간다.]
하였다. 불인선사는 동파의 마음이 불쾌한 줄 알고
[어제는 호악산 위에 앉았더니
한 바퀴 돌아 밝은 달이 소주에 비쳤도다.]
하니 그제서야 마음을 풀고,
“스님께서는 문학이 풍부하고 재주가 뛰어난데
어찌하여 벼슬하여 부모와 선영에 음덕을 쌓고
처자와 자손에 영화를 주지 않습니까?” 하였다.
스님이, 어릴 때부터 학당에 들어가 글을 읽어
자래머리 진재하니 천가지 속에 단계를 헤칠때 만리에 향내난다.
세번 물결에 급하니 용이 손바람을 드리고
아홉겹 구름밖에 봉황의 상서를 받드니
도리혀 출가하여 수행하는 것이 좋고 환가에서 동향하는 것 보다 좋다.하고
[부평금갑은 화당에 차고 알지 못하는 명월은 천리를 통하여
아침 바람 모래위에 불어오니 재비는 흙을 물고 그림들보에 두르고 있네.]
하는 시를 지어 대답했다.
동파가 듣고 있다가,
“스님은 과연 시를 잘 하십니다.
색심을 알지 못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마침 그 때 한 미인이 차를 들고 왔다.
열 손가락으로 찾잔을 받드니 애교와 몸 태도와 모양은 꽃과 같고
동파의 액정은 천금보배 같으니 소승이 보기는 좋으니 삼동외의 맛이다.
동파가 이 시를 듣고 크게 뉘우쳐,
지금까지 영화의 빛을 끊지 못하고 원정무가의 보를 보양할 수 있겠읍니까
하고 일어나 스님께 절하였다.
스님이 혹 동파의 마음이 퇴심할까 염려하여,
[ 조정에 재상과 왕후는 여러 겁을 닦아
전생에 지은것 금생에 받나니 어찌 노력하여 고를구하는다.
만일 즐거히 현중에서 한 생각 돌리면 서방(극락)가는길 선근이 되네.
서간 다소가 명이의 객, 생각에 빠져 머리를 못 돌리네.
동파가 스님의 뜻을 알고 다시 계를 지어 바쳤다.
알았으니 홍진을 헤쳐나 출가하겠읍니다.
오호와 사해 단사를 놓고
배 고프면 산꽃 열매 먹고
목 마르면 맑은 우물 다로 마시고
이리저리 다니며 나무 뿌리나 캐어 먹고
한 세상 늙을까 합니다.
잠이 오면 도화에서 자고 나는 이제 신선되어
이름을 송조(松朝)에 두지 않겠읍니다.]
불인선사는 마지막으로,
[ 천지 인륜 마가의 도는 한이 없어라.
좋은 집, 많은 사람 고운 여자와
평생을 지내어도 그 몸이 그 몸
이신선의 여아는 눈 앞의 꽃이요
인생은 빙빙 돌아 의자와 같나니
모든 애착 다 버리고 어서 뛰어 나소서.]
이로 인해 동파는 곧 불인선사를 따라 출가하여 용맹정진 하다가
깨닫고 보니 자기도 그 옛날 칠계승의 후신이고 불인선사는 오계승이라.
사형 사형 이제사 알았읍니다.
한 생각 뭉게구름 흐르는 물을---
13. 총령의 화신과 눈 속의 파초
보리달마는 남인도 향지 국왕의 셋째 아들이다.
일찌기 출가하여 반야다라에게 법을 받고 사십년 동안 그를 섬기다가
양나라 보통 원년 서기 520년 9월에 광주 남해에 이르러
소주 자사 소앙의 소개로 금릉에 있는 양무제와 만나 문답을 이루게 되었다.
“짐이 위래(位來)에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스님들을 대접하기
이루 말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했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읍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읍니다.”
“어째서 공덕이 없읍니까?”
“인천소과(人天小果:인간이나 천상의 福.報를 초래하는 業)는
유루(有漏:타락이 있는 것)의 因이라
비록있다 할지라도 참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것을 참된 공덕이라 합니까?”
“깨끗한 지혜, 깨끗한 마음은 그 몸이 공적하여 말로 이를 수 없읍니다.”
그러나 무제는 전혀 알아 듣지 못하고 도리어 대사를 사마외도로 취급 하였다.
이에 대사는 곧 양무제를 하직하고 강을 건너
숭산 소림사에 들어가 날마다 벽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일러 벽관바라문이라 일렀다.
이렇게 앉아 있기 9년,
하루는 눈이 무릎에 닿게 쌓였는데
신광이란 중이 와서 감로의 법문을 일러 주실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스님은 적연부동(寂然不動),돌아 보는 일이 없었다.
밤이 깊어 눈이 허리에 차자 비로서 민망히 여겨 신광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구해 눈 가운데 그렇게 서 있느냐?”
“오직 원하오니, 큰 자비를 베푸시사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해 주십시요.”
“모든 부처님들의 위 없는 도는 광겁(曠劫:오랜세월)에도
만나기 어렵거니 어찌 그 조그마한 덕과 지혜,
가벼운 만심(慢心)으로 진승(眞乘)에 오르려 하는가?
단지 수고로움만 더 할 뿐이다.”
신광이 이 말씀을 듣고 크게 뉘우쳐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곧 칼을 빼어 왼쪽 팔을 치니
팔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눈 속에서 파초 한 잎이 올라와 그를 받쳤다.
“모든 부처님이 최초에 법을 구할 때 법을 중히 하므로
몸을 잊었는데 너는 이제 팔을 끊어 나에게 바치니
가히 그 마음을 알겠다.” 하시고
“이제부터 너의 이름을 혜가(慧可)라 하라.”
하였다. 그래도 신광은 마음이 편안치가 못했다.
“스님 저의 마음이 편안치가 못합니다.
스님께서 저로 하여금 마음에 안정을 얻게하여 주십시요.”
“그래 그러면 그 마음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
내가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리라.”
그러나 마음은 찾아도 가히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더구나 갖다 바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마음을 찾아도 가히 얻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너의 마음이 이제 편안 해 졌으리라.”
대동(大同)원년 10월 대사가 장차 열반에 드시려고 시자들을 불러 놓고,
“내 이제 열반에 들려하니 이제 너희들은 각기 얻은 바를 말해보라.”
시자 도부가,
“저의 소견은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고
문자를 떠나지도 않는 것이 도를 씀이 되나이다.”
“너는 나의 살이다.” 하시자.다음에 비구니 총지(摠指)가,
“저의 소견은 가섭불의 나라를 보고 기쁘기 그지 없사오나
한번 보고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가죽이다.”도육(道育)이,
“사대가 본래 공하고 오음이 있지 아니하니
저의 소견은 가히 한 법도 믿음이 없나이다.”
“너는 나의 뼈다.”하고 다시 혜가가 곧 앞으로 나가
절 세번을 하고 본 자리에 돌아와 서니“너는 나의 골수다.”하였다.
“세존께서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 涅槃妙心)을
가섭존자에게 전하여 여기 나에게 이르렀으나
나도 너에게 그것을 다시 전하여,
아울러 믿음의 표시로 가사 1령을 주노니 잘 받드러가지라.
이것은 나의 멸후 2백년에서 그치리라.
예언하시고 끝으로 게송을 한 수 읊으셨다.
내 본래 이 땅에 옴은 법을 전하고 미정(迷情)을 구하고자 함이다.
한 꽃에 다섯 잎이 피었으니결과는 자연히 이루워 지리라.
대사의 입적이 알려지자 나라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웅이산 정림사지에 장사 지냈는데 이듬해 정월 위사(魏使)
송운(宋雲)이 인도에 갔다 돌아오다 총령(悤嶺)이란 고개에서
신 한짝을 지팡이 끝에 걸고 홀로 걸어가시는 대사를 보았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동토와 인연이 다하여 본국으로 가는 길일세.”
하고 그 신 한짝을 흰 종이에 쌓아주며,“이 것을 갔다
나라에 전하면 가히 알 바가 있으리라.”하였다.
사신이 대사를 작별하고 본국에 돌아오니
그 날이 바로 대사별후 1백일이 되는 날이었다.
나라에서는 송운의 말을 듣고 괴이하게 생각하여
웅이의 장지를 열어보니 대사의 신체는 간 곳이 없고
단지 바른쪽 신 한짝만 남아 맞춰보니 한 컬레가 분명했다.
이에 무제가 이 소식을 듣고 무릎을 치고 탄식하며 가로되,
“진불(眞佛)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승 취급을 하였으니
천불(千佛)이 탄생 한들 어찌 이 죄를 다할 수 있으랴!”
하고 대성통곡 하였다 한다.
14. 일자무식이 법을 받다.
영남 신주 백성 노혜승은 나무지개를 짊어지고 여관집에 팔러 갔다가
한중이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홀연히 열림을 느꼈다.
“그런 글은 어디서 배웁니까?”
“기주 황매현 5조 홍인(弘忍)스님을 찾아가면 배울 수 있읍니다.”
혜능은 이 말을 듣고 불연간 은전 열량을 구해
홀로 계신 어머님의 의량(衣粮:옷과 식량)을 삼게하고
집을 떠난지 삼십여일 만에 황매현에 도착했다.
“어디서 무엇하러 왔느냐?”
“예, 저는 영남 신주백성 이온데 부처가 되고자 함이옵고 다른 뜻이 없습니다.”
“남쪽 오량케가 무엇을 배우겠다고?”
“사람은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이 있아오나 불성이야 본래 남북이 없거늘,
무지렁이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으나 마음이야 어찌 다르겠읍니까?”
5조스님께서 말씀 하시려다가 옆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만 말을 마치고
“나가서 대중과 함께 일이나 하라.”하였다.
혜능이 후원에 나와 방아를 찧고 장작을 쪼개기
여덟 달에 이르러서야 5조께서 가만히 와서 보시고,
“네 소견이 가히 씀직하다고 생각하였으나 나쁜 사람들이
너를 해칠런지 몰라서 짐짓 모른체 하였는데 너는 그 뜻을 알겠느냐?”
“예 , 저도 스님의 뜻을 짐작하였기 때문에
감히 스님계신 방문 앞에도 가지 안했읍니다.”
스님은 고개를 끄덕 이시고, '
밖으로 나와 대중을 모으고 일렀다.
“듣거라.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다.
우리가 나고 죽는 것 보다 더 큰 일이 없거늘
너희들은 다만 복이나 구하려 하였지
생사고해에서 헤어나려 고는 하지 않는구나.
만일 제 성품을 모르면 옳은 복인들 어찌 구하여질 것이냐?
너희들은 각기 돌아가서 스스로 지혜를 보고
제 성품의 반야성품(般若性品:지혜의 마음)을 잡아서
게송을 하나씩 지어오라. 보아서 만일 대의를 깨달았으면
의법(衣法)을 전하여 제6대조를 삼으리라.
불 같이 급히하여 지체하지 말지니
생각으로 헤아려서는 맞지 않으리라.”하셨다.
그러나 한 사람도 언하(言下)에 글을 지어 바치는 사람이 없고
모두 교수사(敎授師)인 신수(神秀)스님께 미루었다.
“신수상좌는 우리들의 스승이요 또한 스님의 친척이니
필시 의법은 그리로 전하리라.
우리는 고생하여 글을 지으려 애쓰지 말자.”
이렇게 여러 뻤봉밗 못한 글이다.
겨우 문 밖에 이르렀으니 다시 지어오라. 하였다.
만일 통과하면 자기가 지었다 하고,
그렇지 않으면 모른다 하려 하였는데
스님께서는 먼저 그 마음까지 알고 그를 불러 이렇게 꾸짖어시니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5조께서는 대중들로 하여금
그 글 앞에 향과 초를 사루도록 하고 다같이 그것을 외우라 하였다.
“이 게송대로만 닦아도 안도에는 떨어지지 않을 테니 너희들은 읽고 그대로 행하라.”
스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마치 벌떼가 왕왕 거리는 것 같이 소리가 났다.
혜능은 그곳을 지나다가 신수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는
무슨 소린지 궁금했는데 마침 지나든 행자를 붙잡고 물였다.
“그것은 교수사 신수스님이 지은 것이다. 5조께서 외우면 큰 이익이있다 하였는데 그대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는가?”
“착한 행자야 내 이곳에 묻혀 방아만 찧고 있는데 무엇을 알겠는가? 나도 그것을 친히 뵙고 인사드릴 수 있겠는가?”
“그건 어렵지 않다.”
“그럼 나를 좀 인도해 다오.”
이렇게 해서 혜능은 그 곳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글을 모르는 지라 장님 굿보는 격이었다.
“여러분, 나는 글을 모르니 누가 크게 한번 읽어 주시요.”
그때 강주별가 장일용이 옆에 섰다가 크게 읽었다. 혜능이 듣고 나서,
“나도 게송을 하나 지어 볼 터이니 적어주십시오.”
하두 뜻 밖의 일이라 같잖게 여기고,
“너 같은 게 다 게송을 짓겠다니 희한한 일도 다 있구나.”
하고 조롱했다.
그러나 혜능은 엄숙히 또 정중히,
“위 없는 깨달음을 배우려거든 처음 들어온 사람을 깔보지 마시라.
아무리 낮고 낮은 사람이라도 지혜가 있을 수 있고
높고 높은 사람이라도 어리석을 수 있나니
사람을 없신여기는 것은 큰 죄가 됩니다.
하니 별가는 이 말에 눌려,
그렇다 네 말이 옳다.
내가 써 줄터이니 만일 법을 얻거든 나부터 제도해다오.
하고 붓을 들었다.
菩提本無樹 깨달음에 본디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닐세
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何處苔塵埃 어말이 떨어지자
옆에 모였던 대중들의 눈이 휘둥그래 지며, 이상도 하다.
참으로 사람이란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육신보살이 아니고서야 어찌 저런 글이 저 속에서 나올 수 있으랴!
하고 서로 감탄해 하였다.
5조께서 대중들이 웅성거리며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고
나쁜 사람이 해칠까 염려하므로 신짝으로 혜능의 게송을 문질러 지우면서,
“이것도 아직 견성한 글이 못 된다.”
하셨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뿔뿔이 헤어졌다.
다음 날 5조께서 다시 방앗간에 오셔서
혜능이 허리에 돌을 달고(방아는 무겁고 몸은 가벼우므로)
방아를 찧는 것을 보시고, 도를 구하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하느니라.
하시고,
“쌀이 얼마나 익었느냐?”
물으셨다.
“쌀은 익은지 오래 되었으나 키질을 아직 못 하였나이다.”
대답하니 짚고 오신 지팡이로 방아확을 세번 치시고 돌아 가셨다.
혜능이 그 뜻(쌀이 얼마나 익었느냐 하신 말씀은
공부가 얼마나 되었느냐 하는 말씀이고
쌀은 익은지 오래이나 키질을 아직 못하였다 함은
공부는 다했어도 스승을 선택치 못하였다는 뜻이며
지팡이로 방아확을 세번 치고 돌아간 것 은 밤3경에 찾아 오라는 뜻이였다.)
[마땅히 머무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하는 대목에 이르러 혜능이 크게 깨닫고,
어찌 제 성품이 본래 청정함을 알았으리까?
어찌 제 성품이 본래 나고 죽지 않음을 알았으리까?
어찌 제 성품이 본래 부족함이 없음을 알았으리까?
어찌 제 성품이 본래 흔들림 없음을 알았으리까?
어찌 제 성품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으리까?
하였다.
5조께서 혜능이비로서 본 성품을 깨달은 줄 아시고,
본 마음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법을 배워도 유익할 것이 없느니라.
제 본마음을 알고 제 본 성품을 보면 곧 이 것이
대장부 좆윱잔옷과 바루를 주시뗬庸ᆅ 이제 너는 제6대조가 되었으니
잘 기키어 나가며 널리 중생을 제도하여 앞으로 끊어짐이 없이 하라.
하시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有情來下種 뜻이 있는 데서 씨가 내리어
因地果還生 원인 되는 곳에 과가 도로 나네
無情旣無種 뜻 없으면 씨도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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