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

마조어록

월광화 2022. 8. 3. 11:04

 

강서 지방의 도일 선사는 한주의 시방편 사람으로서, 

속성은 마씨이다, 

시방현의 나한사에서 출가했다. 

용모가 기이하였는데, 

걸음걸이는 소와 같았고 눈초리는 호랑이와 같았으며, 

혀를 내밀면 코에 닿았고 발바닥에는 두 개의 바퀴 무늬가 있었다. 

어릴 때 자주의 당 화상에게 의지하여 머리를 깍았고, 

뒤에 유주의 원을 율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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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개원(開元)년간(年間)

형악의 전법원(傳法院)에서 선정을 익히다가 회양 화상을 만났다. 

회양은 도일이 진리를 담을 만한 그릇이 됨을 알아보고는 물었다.

"대덕은 좌선을 하여 무엇을 꾀하시오?"

도일이 말했다.

"부처되기를 꾀합니다."

회양은 이에 벽돌 한 개를 가져와 그 암자 앞에서 갈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고 도일이 물었다.

"벽돌을 갈아서 어쩌려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 하오."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벽돌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이에 도일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달구지가 가지 않는다면 달구지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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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은 회양의 가르침을 들으니 마치 제호를 마신 듯이 시원하였다. 

이에 회양에게 절하고 다시 물었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 모습 없는 삼매에 부합하겠습니까?"

"그대가 마음이라는 진리를 배우는 것은 마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진리의 요점을 말해 주는 것은  저 하늘이 비를 내려 적셔 주는 것과 같다.

그대는 이번 기회에 인연이 맞았으므로 이제 도를 볼 것이다."

 

"도는 보이는 모습이 아닌데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마음에 갖추어진 진리를 보는 눈이 도를 볼 수 있다. 

모습 없는 삼매도 역시 그렇게 보는 것이다."

"이루어졌다가 부서지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이루어지고 부서지고 모이고 흩어짐을 가지고 도를 본다면, 

이것은 도를 보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게송을 들어라."

회양이 말했다.

 

"마음이라는 땅에는 모든 씨앗들이 들어 있는데,

 비가 오면 모두가 싹을 틔우네.

 삼매라는 것은 꽃은 모습이 없으니,

어떻게 부서지고 어떻게 이루어지랴."

 

애초에 육조혜능이 남악회양에게 말하기를,

"인도의 반야다라가 예언하기를 그대의 발밑에서

한 마리 말이 나와

천하의 사람들을 밟아 죽일 것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는데, 

아마 마조도일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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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악회양에게는 6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오직 마조도일만이 은밀히 마음도장을 받았다.

 처음에 건양의 불적령에서 임천으로 옮겨 갔다가, 

뒤에 남강의 공공산에 이르렀다. 

대력(大曆년간에 종릉(鐘陵)의 개원사(開元寺)에 적을 두었다. 

그때 연수인 노사공이 마조의 소문을 듣고

우러러 사모하여 직접 그 근본 뜻을 받았다. 

이 일로 말미암아

사방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도일의 문하로 모여들었다.

 

회양 화상은 마조가 강서에서

가르침을 펼친다는 소문을 듣고서 대중에게 물었다.

"도일이 대중에게 법을 말하느냐?"

대중이 대답하였다.

"이미 대중에서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을 전혀 보지 못하겠구나."

드디어 회양은 한 스님을 그곳에 보내어, 

마조가 상당할 때 '어떻습니까?' 하고 묻고,

그가 대답하거든 기억해 오라고 시켰다.

 

그 스님이 회양이 시키는 대로 가서 물으니, 마조가 말했다.

"마음대로 살아온 30, 단된장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 스님이 돌아와 회양에게 그대로 말하니, 회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조의 입실제자는 139명이었는데, 

각자 한 지방의 종주가 되어 교화를 끝없이 펼쳤다. 

마조는 정원(貞元)4년 정월에 건창의 석문산(石門山)에 올라

숲 속을 걷다가 바닥이 평탄한 구덩이를 보고는 시자에게 말했다.

"나의 병든 몸이 다음 달에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말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이미 병든 기색을 보였다.

 

원주가 물었다.

"스님, 요사이 건강이 어떻습니까?"

마조가 말했다.

"나날이 부처를 만나고, 다달이 부처를 만난다."

 

21일에 목욕하고 단정히 앉아서 입멸하였다. 

원화(元和) 년간에 대적선사(大寂禪師)라고 시호하고, 

탑은 대장엄(大莊嚴)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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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가 대중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각자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어라.

이 마음이 부처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

상승의 일심법을 전하여 그대들을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능가경]을 인용하여 중생의 마음을 확인시킨 것은,

그대들이 거꾸로 되어 이 하나의 마음이

그대들 각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가경]에서는, 

부처가 말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고 문 없는 문을 진리의 문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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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진리를 찾는 자는 찾는 것이 없어야 하니,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따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이라고 하여 취하지도 말고

악이라고 하여 버리지도 말며, 

깨끗함과 더러움의 어느 쪽에도 기대지 말아야 한다.

 

죄의 자성이 공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어느 순간에도 죄는 있을 수 없으니, 자성이란 본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계는 오직 마음이며, 삼라만상은 한 개 마음의 흔적이다.

  

무릇 색을 본다는 것은 마음을 보는 것이다.

마음은 저 홀로 마음인 것이 아니라, 

색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다만 언제든지 말을 하기만 하면

현상으로 나아가는 도리로 나아가든 전혀 막힐 것이 없다.

깨달음이라는 열매도 역시 이와 같다.

 

마음에서 생겨난 것을 이름하여 색이라 하는데, 

색이 공()임을 알면 생겨나는 것은 곧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이 뜻을 깨달으면, 

언제나 옷 입고 밥 먹으며 성태(聖胎)를 키우고, 

인연따라 시간을 보낼 것이니,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나의 게송을 들어라.

 

마음이 그때그때 말하고,

깨달음도 그러할 뿐이다.

 

현상에도 이치에도 막힘이 없으니,

지금의 삶은 곧 삶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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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도를 닦는 것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도는 닦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만약 닦아서 도를 이룬다고 하면,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은 다시 부서지니

곧 성문과 같을 것이다. 

만약 닦지 않는다고 하면,

곧 범부와 같을 것이다."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견해를 내어야 도에 통달할 수 있습니까?"

마조가 말했다.

"자성은 본래부터 완전하여 모자람이 없다.

그러므로 다만 선이니 악이니 하는 일에 머물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이라고 일컬을 것이다.

선에 머물고 악을 제거하며, 

공을 관하고 선정에 들어가는 것 등은 곧 조작(造作)에 속한다.

 

만약 다시 밖으로 치달려 구한다면,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다만 삼계를 헤아리는 마음이 없게만 하여라.

한 생각 허망한 마음이 곧 삼계에서 태어나고 죽는 뿌리가 되니, 

다만 한 생각이 없기만 하면, 

곧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의 뿌리를 없애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범부는 허망한 생각, 아첨, 왜곡, 삿됨, 거짓, 

자기중심적 의식, 잘난 체함 등이 합하여 하나의 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길, '다만 여러 법()이 모여서

이 몸을 이루니, 나타날 때에도 오직 법이 나타날 뿐이고

사라질 때에도 오직 법이 사라질 뿐이다. 

이 법이 나타날 때에 내가 나타난다고 말하지 말고, 

사라질 때에도 내가 사라진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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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순간, 뒤 순간, 가운데 순간에 순간순간 응대할 것이 없고

순간순간 고요히 사라진 것을 일러,

해인삼매(海印三昧)가 모든 법을 포섭한다고 한다.

 

마치 수없이 많은 다른 물줄기가 함께 큰 바다로 돌아가면

모두 바닷물이라 불리는 것과 같다.

 

하나를 맛보면 모든 것을 맛보는 것이고,

큰 바다에 머물면 모든 물줄기에 섞이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큰 바다에서 목욕하면

곧 모든 물줄기를다 사용하는 것과 같다.

 

해인삼매(海印三昧): 해인정(海印定)이라고도 함.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하려 할 때에 들어간 선정의 이름. 

바다에 풍량이 쉬면, 

삼라만상이 모두 바닷물에 비치는 것과 같이, 

번뇌가 끊어진 부처님의 안정된 마음 가운데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법이 밝게 나타나므로 해인정이라 한다

.[대혜보각선사어록6권 용어사전]

 

그러므로 성문은 깨달은 듯하다가 도리어 미혹하게 되고, 

범부는 미혹함 속에서 깨닫게 된다.

성문은, 성인(聖人)의 마음에는 본래 지위(地位), 

인과(因果), 계급(階級)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마음으로 헤아려 수행이 원인이고 깨달음이 결과라고 허망하게 생각한다.

 

공정(空定)에 머물러 긴긴 시간을 보내면, 

비록 깨닫는다고 하여도 깨닫고 나서 다시 미혹해진다.

모든 보살()이 이러한 성문을 마치 지옥의 고통과 같이 여기는 것은, 

성문이 이처럼 공()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러 불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문(聲聞): 소리를 듣는 사람이란 뜻이다. 

부처의 설법을 듣고서 깨닫는 사람을 가리킨다. 

원래는 석가모니의 제자들을 가리킨 말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을 구분하여 말할 경우에는 뜻이 달라진다. 

이때의 성문은 소승불교의 수행자로서 방편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여 지혜를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지혜와 어리석음을 구분하고 부처와 중생을 구분하여

이쪽을 취하고 저쪽을 버리는 분별에 바탕을 둔 수행을 하여,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를 취하며

중생을 떠나 부처가 되려고 하므로 의도적인 조작이 되어서, 

본래 둘이 없는 참된 진리에는 이를 수가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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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상근기 중생이라면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서

말을 듣고 바로 깨달아서,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 즉시 본성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경전에 말하기를,

'범부에게는 되돌아오는 마음이 있으나, 성문에게는 없다.'고 한 것이다.

 

미혹에 대응하여 깨달음을 말하니

본래 미혹이 없다면 깨달음 또한 있을 수 없다. 

일체 중생은 애초부터 법성삼매(法性三昧)

벗어난 적이 없이 늘 법성삼매 속에서

옷 입고 밥 먹고 말하고 응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육근(六根)의 작용과

모든 행위와 동작이 전부 법성(法性)이다.

 

근본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 이름을 따르고 모습을 좇으면

미혹한 생각이 망령되이 일어나 여러 가지 업을 짓게 되지만, 

만약 한순간 돌이켜 비추어 볼 수 있다면 모두가 성인의 마음이다.

 

그대들은 모두 각자 자기의 마음에 통달하고, 

내 말은 기억하지 말라. 

강바닥의 모래알만큼 많은 도리를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 마음은 늘어나지 않으며, 

비록 말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 마음은 줄어들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대의 마음이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그대의 마음이다.

나아가 몸을 나누어 나타나고 빛을 낸다거나 

18가지로 신통한 변화를 나타낸다고 하여도

나에게는 불 꺼진 재를 되돌려 주는 것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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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지나 불 꺼진 재에 불씨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마치 성문이 망령되이 닦음에 근거하여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과 같고, 

아직 장맛비가 지나지 않아 불 꺼진 재에 불씨가 남아 있는 것은

마치 보살의 도() 공부가 순수하게 무르익어서

어떤 나쁜 것에도 물들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여래가 방편으로 가르친 삼장(三藏)을 말한다면,

아무리 긴 세월 동안 말하더라도 끝이 없어서

마치 쇠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지만,

 

만약 성인의 마음을 깨닫는다면, 남은 일이 전혀 없다.

오래 서 있었으니 그만 쉬어라."

 

법당에 올라 말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더럽히지만 말라.

 

어떤 것이 더럽히는 것인가?

분별하는 마음으로써 조작하고 추구하기만 하면

모두 바로 더럽히는 것이다.

 

즉시 도를 알고 싶은가?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이다.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 하는가?

조작함이 없고, 옳고 그름을 따짐이 없으며, 

취하거나 버림이 없고, 

끊어짐과 이어짐이 없으며, 

범부도 없고 성인도 없는 것이 바로 평상심이다.

경전에 말하기를, '범부의 행위도 아니고

성인의 행위도 아닌 것이

바로 보살의 행위이다.'라고 하였다.

 

다만 지금 가고 머물고 앉고

누우며 때에 따라 사물을 대함이 모두 도이다. 

도는 곧 법계(法界)인데, 

온갖 묘한 작용이 모두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일러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고 말하고, 

무엇을 일러 무진등(無盡燈)이라 말하겠는가?

 

모든 것은 전부 마음이다.

모든 이름은 전부 마음의 이름이다.

온갖 것들의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니 마음이 만물의 근본이다.

 

경전에,

'마음을 알아 근원에 통달하니 그 때문에 사문(沙門)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름도 같고 뜻도 같고 모든 것들이 전부 같아서, 순수한 하나이고 뒤섞임이 없다.

 

 사문(沙門): 출가 수행자, 승려

 

만약 교문 속에서도 언제나 자재할 수 있다면, 

법계를 세우면 모두 법계 아님이 없고, 

진여를 세우면 모두 진여 아님이 없고, 

이치를 세우면 모든 법이 이치 아님이 없고, 

사실을 세우면 모든 법이 사실 아님이 없다.

 

하나를 들면 천 가지가 따라오니, 이치와 사실이 서로 다르지 않다.

모두가 오묘한 작용이고 다시 무슨 특별한 원리는 없다.

모두가 마음의 작용에서 말미암는다.

 

비유해서 말하면, 

달그림자는 여럿이 있으나 달은 하나뿐이며, 

샘은 여럿이 있으나 물은 하나뿐이며, 

삼라만상은 다양하나 허공은 하나뿐이며, 

도리를 말하는 것은 다양하나 막힘없는 지혜는 하나뿐임과 같다.

 

여러 가지가 성립되지만,

모두가 한 마음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일으켜 세워도 좋고 싹 쓸어 버려도 좋으니,

모두가 오묘한 작용이며

모두가 자신의 일이다.

 

진리를 떠나서는 설 곳이 없으니

서 있는 곳이 바로 진리이며,

모두가 자신의 본바탕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자라면, 또 어떤 사람인가?

 

 

모든 것이 전부 불법이니, 모든 것은 곧 해탈이다.
해탈이란 곧 진여이니, 모든 것은 진여를 벗어나지 않는다.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이 모두 생각으로는 헤아려 볼 수 없는 작용이며,
때를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전에서는 '곳곳이 부처 있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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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는 능인이니 지혜롭고 뛰어나게 작용하는 성질을 갖추고 있어서, 

모든 중생의 의심의 그물을 잘 부순다.

있으니 없느니 하는 등의 결박에서 빠져나와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분별이 사라지고

사람과 세계가 모두 공이면, 

둘 없는 법바퀴를 굴리며 숫자로 헤아림을 벗어나

하는 일에 막힘이 없고 사실과 이치에 모두 통한다.

 

마치 하늘에서 구름이 일어나 문득 다시 없어지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과 같고, 

물에다 그림을 그려서 무늬가 나타나지만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님과 같다.

이것이 바로 대적멸이다.

 

번뇌에 묶여 있을 때를 일러 여래장이라 하고, 

번뇌에서 벗어날 때를 일러 청정법신이라 한다.

법신은 끝이 없어서,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지만,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으며,

모날 수도 있고

둥글 수도 있으며,

 

사물을 따라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마치 물 속의 달과 같아서,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뿌리를 내리지는 않는다.

 

유위를 없애지도 않고, 

무위에 머물지도 않는다. 

유위는 무위가 작용하는 것이고, 

무위는 유위가 의지하는 것이지만,

의지함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허공처럼 의지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심생멸(心生滅)이란 뜻도 있고, 

심진여(心眞如)란 뜻도 있다.

심진여란 비유하면 밝은 거울이 모습을 비추는 것과 같다.

거울은 마음에 해당하고 모습은 모든 대상에 해당한다.

 

만약 마음이 대상을 취하면

바깥 인연과 교섭하게 되니 바로 생멸의 뜻이며,

어떤 대상도 취하지 않으면 바로 진여의 뜻이다.

 

성문(聲聞)은 듣고서 불성(佛性)을 보며,

 보살은 눈으로 불성을 본다.

 

둘이 없음을  밝게 통달하는 것을 일컬어 평등한 본성(本性)이라고 한다. 

본성에는 다름이 없으나, 

작용은 같지가 않다. 

미혹에  있으면 식()이고, 

깨달음에 있으면 지혜이다.

이치를 따르면 깨달음이고,

사실을 따르면 미혹이다.

 

미혹은 곧 스스로의 본심에 미혹한 것이고,

깨달음은 곧 스스로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한 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달아서, 다시는 미혹하지 않는다.

 

마치 태양이 떠올랐을 때 어둠과 화합하지 않는 것처럼,

 

지혜의 태양이 떠오르면 번뇌의 어둠과 함께 하지 않는다.

 

 

마음과 경계에 밝으면, 망상은 생기지 않는다.

 

망상이 생기지 않으면, 곧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본래 있는 것이 지금 있으니,

수도(修道)나 좌선(坐禪)에 의지하지 않는다.

 

수도도 하지 않고 좌선도 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다.

 

지금 만약 이 이치가 진실하고 바름을 알았다면, 

어떤 업()도 짓지 않고분수에 따라 살면서, 

한 벌의 옷을 입고, 

앉고 일어서고 하는 행동을 따라서

계행(戒行)  더욱 익숙해져서 깨끗한 업을 쌓을 것이다.

 

단지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통하지 못할까 염려하겠느냐?

오랫동안 서 있었으니, 대중은 이제 쉬어라."

 

서당지장과 백장회해와 남전보원이

마조를 모시고 함께 달구경을 하는데, 마조가 말했다.

"바로 이러한 때에는 어떠냐?"

서당이 말했다.

"공양하기에 딱 좋습니다."

백장이 말했다.

"수행하기에 딱 좋습니다."

남전은 소매를 떨치고 바로 가 버렸다. 

이에 마조가 말했다.

"()은 장에 들어가고, 

()은 해로 돌아가는데, 

오직 보원만이 홀로 사물 밖으로 벗어났구나."

남전보원이 대중에게 식사로서 죽을 나누어 주고 있는데,

마조가 물었다.

"통 속은 무엇이냐?"

남전이 말했다.

"이 노인네가 입을 다물고서 어떻게 말하나?"

마조는 곧 그만두었다.

 

백장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의 참뜻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바로 그대가 목숨을 내려놓을 곳이다."

 

원주의 대주혜해가 처음 마조를 참례하였을 때, 마조가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월주의 대운사에서 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하려 하는가?"

"불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의 보물 창고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리고 이리저리 다녀서 무엇 하려는가? 

나의 이곳에는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구한다는 것인가?"

대주가 이에 절하고 물었다.

"무엇이 저 자신의 보물 창고입니까?"

"바로지금 나에게 묻는 그것이 그대의 보물 창고이니라. 

그것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고

조금도 부족도 없으며 사용이 자재한데, 

무엇을 밖에서 구하고 찾는가?"

 

대주가 말을 듣고서 본래의 마음을 저절로 알고는, 

자기도 모르게 뛸 듯이 기뻐하며 절을 하여 감사를 표했다. 

그 후 6년을 곁에서 모시다가 돌아갔는데,

[돈오입도요문론] 1권을 지었다. 

마조가 그 책을 보고는 대중에게 말했다.

"월주에 큰 구슬이 있는데

두루 밝은 광명이 자재하게 비추어서 막힌 곳이 없다."

 

늑담법회 선사가 마조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고 가까이 오라!"

법회가 곧 가까이 다가가자, 

마조는 그를 한 대 쥐어박고는 말했다.

"엿듣는 사람이 있어서 안되겠다. 내일 오너라."

 

다음 날 법회가 와서 법당에 들어가 말했다.

"스님, 말씀해 주십시오."

마조가 말했다.

"우선 갔다가, 

내가 상당할 때에 나오너라. 그대에게 증명해 주겠다."

법회가 이에 깨닫고는 말했다.

"대중이 증명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법회는 법당을 한 바퀴 돌고는 곧 가 버렸다.

 

늑담유건 선사가 하루는 법당 뒤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다, 

마조가 그것을 보고는 곧 유건의 귀에 

'!, !' 하고 바람을 두 번 불어넣었다. 

유건은 선정에서 깨어나

그가 마조임을 알아보고는 다시 선정에 들었다.

 

마조는 방장으로 돌아와 사자를 시켜

차 한 잔을 유건에게 가져다주게 하였다. 

유건은 차를 돌아보지도 않고 곧바로 승당으로 돌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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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있음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 없음에도 머물지 마라.

 

마음 있음에 머물면

보느랴고 잠을 못 자고

 

마음 없음에 머물면

눈뜨기 싫어

눈 감고 밥을 먹는다.

 

마음이 뭔가?

어떤 게 마음인가?

 

유건의 귀에 '!, !' 부는 게 마음이고,

차를 보지도 않고 승당으로 돌아가는 게 마음이다.

 

이 마음, 저 마음 택하지 않으면

원래 자는 사람 깨우기는 차 한 잔이 좋고

깨어 있는 사람에게도

차 한 잔이 좋다.

 

차 한 잔은 그대로인데

마조 스님도

막을 수 없이,

마실 사람은 벌써 나가버렸네.

 

석공혜장 선사는 본디 사냥을 직업으로 삼고 있던 사람으로서

출가사문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어느 날 사슴의 무리를 뒤쫓다가

마조가 있는 암자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마조가 그를 맞아들이니 혜장이 물었다.

 

"스님은 사슴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마조가 말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냥꾼입니다."

"활을 쏠 줄 압니까?"

"잘 쏩니다."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쏩니까?"

"하나의 화살로 한 마리를 쏘아 잡습니다."

"당신은 활을 잘 쏠 줄 모르는군!"

 

"스님은 활을 쏠 줄 아십니까?"

"쏠 줄 압니다."

"스님은 하나의 화살로 몇 마리나 쏩니까?"

"하나의 화살로 한 떼를 쏘아 잡습니다."

"저들이나 우리나 모두 생명이 있는 것들인데, 

어찌하여 저들을 한 떼나 모두 쏘아 잡습니까?"

"그대가 이미 이와 같이 알고 있다면, 

어찌하여 스스로를 쏘아 잡지는 않는가?"

"만약 저에게 스스로를 쏘라고 하시면, 

손댈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아, 끝없이 가져온 무명번뇌를 오늘 당장 쉬도록 하게!"

혜장은 그때 활과 화살을 버리고, 

칼을 들어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고는 마조에 의지하여 출가하였다.

 

 

어느 날 석공이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데 마조가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소를 키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키우느냐?"

"한 번 풀 밭으로 들어가면, 곧장 코를 붙잡고 끌어냅니다."

"그대는 참으로 소를 잘 키우는구나!"

 

한 승려가 마조에게 물었다.

"스님! 사구(四句)를 떠나고 백비(百非) 끊고서

저에게 서쪽에서 온 뜻을 바로 가리켜 주십시오."

마조가 말했다.

"내가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니, 그대는 지장에게 가서 물어보라."

 

그 승려가 이에 지장에게 가서 물으니, 지장이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마조 스님에게 묻지 않는가?"

"스님께서 저에게 상좌(상좌)께 물어보라고 시켰습니다."

지장은 손으로 머리를 만지면서 말했다.

"오늘 나는 머리가 아프니, 그대는 회해사형에게 가서 물어보라."

 

그 승려가 다시 회해에게 가서 물으니, 회해가 말했다.

"나는 여기에서 도리어 알지 못하겠다."

그 승려가 마조에게 이러한 일들을 이야기하자 마조가 말했다.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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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보철 선사가 어느 날 마조를 모시고 길을 가다가 물었다.

"무엇이 대열반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급하구나."

"급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을 보아라."

대매산의 법상 선사가 처음 마조를 찾아와서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바로 이 마음이 부처다."

법상은 크게 깨쳤다.

 

 

뒤에 대매산에 머물렀는데, 

마조가 이 소식을 듣고는 한 승려를 보내어 묻게 했다.

"스님은 마조 스님을 뵙고서 무엇을 얻었기에 곧 이 산에 머무십니까?"

 

법상이 말했다.

"마조 스님은 나에게 ' 

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곧 여기에 머물렀습니다."

 

그 승려가 말했다.

"요즈음 마조 스님의 불법은 또 달라졌습니다."

 

법상이 물었다.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요즈음은 다시 말하길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하고 하십니다."

 

이에 법상이 말했다.

"이 노인네가 사람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이 끝날 날이 없구나. 

그대는 좋을 대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하라. 

나는 다만 이 마음이 곧 부처일 뿐이다."

 

그 승려가 돌아와 이것을 마조에게 말하자, 마조가 말했다.

"매실이 익었구나."

 

분주무업 선사가 마조를 찾아왔을 때, 

마조는 그의 풍채가 훌륭하고

목소리가 종소리같이 우렁찬 것을 보고는 말했다.

"으리으리한 불당인데 그 속에 부처가 없구나."

 

무업이 절을 하고 끓어앉아 물었다.

"삼승의 학문은 대강 그 뜻을 살펴보았습니다만, 

늘 듣기로 선문에서는 바로 이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알지 못하는 마음이 곧 이것이고, 다시 다른 물건은 없다네."

 

무업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와 비밀리에 전한 마음도장입니까?"

"스님은 정말 시끄럽군. 우선 갔다가 다른 때 오게."

 

"스님!"

무업이 머리를 돌리자 마조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이냐?"

무업이 곧 깨닫고는 절을 하니, 마조가 말했다.

"이 둔한 사람아, 절은 해서 뭐하나?"

 

등은봉이 마조에게 인사를 하니 마조가 물었다.

"어디로 가느냐?"

"석두로 갑니다."

"석두로 가는 길은 미끄럽다."

"간목(竿木)에 몸을 의지하여, 마당을 만나면 한바탕 놀아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바로 갔는데, 

석두에 도착하자마자 선상을 한 바퀴 돌고는

석장으로 땅을 한 번 쿵 짚으며 물었다.

"이것은 무슨 종지입니까?"

석두가 말했다.

"아이고! 아이고!"

등은봉은 할 말이 없었다. 

돌아와 마조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

마조가 말했다.

"다시 가서 그가 '아이고, 아이고'하거든, 

너는 곧 '! !'라고 하여라."

등은봉이 다시 가서 앞서와 같이 물으니,

석두가 이에 "! !"하고 소리를 냈다.

 

등은봉은 할 말이 없어졌다. 

돌아와 마조에게 그대로 말하자,

마조가 말했다.

"석두로 가는 길은 미끄럽다고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하루는 등은봉이 흙을 실은 수레를 밀고 가는데, 

마조가 길 위에 다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등은봉이 말했다.

"스님, 다리를 거두어 주십시오."

마조가 말했다.

"이미 펼쳤으니 거두어 들이지 못한다."

등은봉이 말했다.

"이미 나아가고 있으니 물러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그대로 수레를 밀고 지나가는 바람에 마조가 다리를 다쳤다.

 

법당으로 돌아간 마조는 도끼를 손에 쥐고서 말했다.

"아까 노승의 다리를 치어서 다치게 한 놈은 나오너라."

등은봉은 곧 나아가서

마조 앞에서 목을 쭉 뺐다.

마조가 이에 도끼를 내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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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구 화상이 처음 마조를 찾아왔을 때,

마조가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오구에서 옵니다."

"오구 스님은 요즈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몇 사람이나 여기에서 어쩔 줄 몰라 쩔쩔맸을까"

"어쩔 줄 모르는 것은 우선 내버려 두고, 고요한 한마디는 어떤가?"

 

석구가 이에 앞으로 세 걸음 다가왔다. 마조가 말했다.

"내가 오구 스님을 일곱 대 때려야겠는데, 

그대에게 대신 때려줄 것을 부탁하네. 

기꺼이 그렇게 하겠는가?"

석구가 말했다.

"스님께서 먼저 방망이 맛을 보시면, 

제가 그 뒤에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오구로 돌아갔다.

 

양좌주가 마조를 찾아오자 마조가 물었다,

"좌주께선 경론을 잘 강설하신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양좌주가 말했다.

"별 말씀을 ……"

"무엇을 가지고 강설합니까?"

"마음을 가지고 강설합니다."

"마음은 능숙한 기생과 같고

의식은 기생과 더불어 노는 자와 같은데, 

어떻게 경()을 알겠습니까?"

 

양좌주가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마음이 강설하지 못한다면, 허공이 강설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리어 허공이 강설할 수 있습니다."

양좌주는 긍정하지 않고 곧 나갔다. 

막 계단을 내려가려 하는데, 마조가 불렀다.

 

"좌주!"

양좌주는 머리를 돌리다 문득 크게 깨닫고는 곧 절을 올렸다.

"이 둔한 스님아, 절은 무엇하러 하는가?"

"제가 경론을 강설하면서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여겼는데, 

오늘 마조대사의 한 번 물음에 일평생의 공부가

얼음이 녹고 기와가 부서지듯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곧장 서산으로 들어가서는 다시는 종적이 없었다.

 

홍주에서 수로의 화상이 처음 마조를 찾아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한 뜻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절하라."

수로가 엎드려 절을 하는데, 마조가 곧 한 번 밟아 버렸다.

이에 수로가 크게 깨달았다. 

일어나 박수를 치며 "! !"하고 크게 웃고는 말했다.

 

"참으로 신기하다

참으로 신기해. 온갖 삼매와 헤아릴 수 없는 묘한 뜻을

다만 한 털끝 위에서 곧 근원까지 알아 버렸구나."

곧 절을 하고는 물러갔다. 뒷날 대중들에게 말했다.

"마조 스님에게 한 번 밟힌 이래도 지금까지 웃음이 그치질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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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밟았다고 화를 내겠지요? 

깨치는 순간, 밟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 어떤 장애도 없어집니다. 

원래 있었던 이것이 확~드러납니다. 

그렇게 문자로, 

생각으로 남들이 뱉어놓은 말을 따르고 공부했는데, 

그게 한순간에 싹~ 없어집니다. 

알 때에는 그런 의문에 대한 무슨 정답이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한 뜻입니까?", 

진짜 그 뜻이 뭘까 하고 궁금해하던

그 생각이 싹 사라지고 이게 있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빠져서 그 생각에 흘려서

도저히 보이지 않던 이게 확 드러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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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어느 한마을에 미끄럼 고개가 있는데, 

그 고개를 사람들은 조심히 걸었습니다. 

왜냐면 그 고개에서 미끄러지면 3년 안에 죽는다는 설이 내려오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연세 많은 할아버지가 잘못해서 미끄러졌습니다. 

할아버지는 곧 3년 안에 죽는다고 마음병을 앓아 버렸습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머리를 싸매고 이불에서 끙끙 앓고만 있으니

온 집안의 어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지요 

때마침 서당에 다니던 손자가 꾀를 내었어요.

 

손자는 얼른 할아버지에게 갔어요.

"할아버지, 일어나셔서 다시 그 고개에서 미끄러지세요.

" 할아버지는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러자 손자는 말했습니다.

"한 번 넘어지면 3년이니까 2번은 6,

3번은 9, 10번 넘어지면 30년을 더 살 것입니다.

" 할아버지는 얼른 그 고갯길에서 미끄러지면서 껄껄 웃었습니다.

1, 2, 3, 이렇게 넘어지면서 더 크게 행복하게 웃으셨지요. 

온 집안의 고민이 해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이야기 같지만

이 깨치는 것도 비슷합니다. 

생각의 차이, 생각의 반전,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더 이상 '3년 안에 죽는다.'라는 생각에 속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입니다. 

고갯길은 늘 있는 고갯길이고

미끄러질 수도 있고 안 미끄러질 수도 있죠. 

그런데 생각은 미끄러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생각을 맞는다고 자기 머릿속에 관념으로 들어간 순간, 

그 평범하던 고갯길은 안 넘어지는데 초집중을 합니다. 

그처럼 우리의 모든 관념들이

처음에는 없었지만 언젠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배우고 익히고 남이 뱉어놓은 '생각'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경전도, 조사 어록도 생각으로 이해하면,

'조사의 분명한 뜻'을 묻게 됩니다. 

뭔가 있기는 한데, 전혀 알 수 없는 게 제일 좋습니다.

 

뭔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이렇게 관념의 찌꺼기들이

자석처럼 붙으면 그것은 상(形想)을 가지게 되고

자신이 의지하게 됩니다. 

모든 게 생각일 뿐입니다. 

생각, 이 생각은 누가 합니까? 자신이 하고 있습니다. 

늘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밥 먹고 잠자고 일을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게 자신이 하고 있어요. 

그런데 '자신이 하고 있다'라는 이것도 생각이지요. 그렇잖아요? 

그 생각을 빼면 다만 할 뿐입니다. 누가?,

'누가' 하는 것은 생각입니다. 

생각, 이 생각을 넘어서면 원래 있는 이것이 다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

 

언제나 이게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해도 다만 이것입니다. 

생각은 항상 공간에 테두리를 칩니다. 

이쪽에서 보면 이렇게 보이고

저쪽에서 보면 저렇게 보이고

위에서 보고 아래에서 보고 보이는 것들이 모두 다릅니다. 

? 테두리가 있으니 그 테두리 안만 보면 다 다르게 보이지요. 

그런데 ''을 보면 뭐가 보여요? 

다 보이는데, 기준이 없어요. 

테두리를 걷어내면 안과 밖이 어디 있습니까? 

생각은 밖을 볼 수가 없어요. 

? 오랜 습성으로, 오로지 '테두리 안'만 보도록 돼 있지요. 

깨침은 그 테두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밖을 한번 보고 테두리의 실체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웃음이 나오지요.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 언제나 지금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할 말이 없어요. 그래서 침묵이 좋다는 것입니다. 

할 말이 많은데 침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

방거사가 마조에게 물었다.

"만법과 짝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그대가 한입에 서강의 물을 몽땅 마시기를 기다려서, 그대에게 말해 주겠다."

 

다시 마조에게 물었다.

"본래인(本來人)을 어둡게 하지 마시고, 스님께선 눈을 높이 들어 바라보십시오."

마조가 여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방거사가 말했다.

"하나의 줄 없는 거문고를 스님만이 묘하게 잘 타시는군요."

 

마조가 곧 위를 쳐다보았다. 방거사가 이에 절을 하니, 

마조는 방장으로 돌아갔다. 

방거사가 마조 뒤를 따라 들어와서는 말했다.

"아까는 잔꾀를 부리다가 도리어 어설프게 되었습니다."

 

다시 물었다.

"예컨대 물에는 근육도 뼈도 없는데, 

능히 만 섬을 싣는 배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 도리가 어떻습니까?"

마조가 말했다.

"여기에는 물도 없고 배도 없는데, 무슨 근육과 뼈를 말하는가?"

한 승려가 물었다.

"스님은 무엇 때문에 이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씀하십니까?"

마조가 말했다.

"어린아이가 우는 것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울음을 그친 뒤에 어떻습니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이 두 종류가 아닌 사람이 오면 어떻게 가리켜줍니까?"

"그에게 어떤 물건도 아니라고 말해 준다."

"문득 그 속의 사람이 올때에는 어떻습니까?"

"먼저 그가 대도(大道)를 직접 깨닫도록 해 준다."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바로 지금은 무슨 뜻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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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뜻인가?

 

바람이 불면 시원하지만

바람이 없는 곳에서는 선풍기 앞이 시원하네.

 

그대는 어느 쪽에서 왔는가?

모든 것이 동서남북에 있지만

오직 그대만이

자리가 없네.

 

''하면 ''에 있고, ''하면 서에 있고, ''하면 남에 있고,

''하면 북에 있는데, 지금 이 자리는 어딘가?

어떤 승려가 말했다.

"어떻게 도에 합할 수가 있습니까?"

마조가 말했다.

"나는 도와 합했던 적이 없다."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마조가 때리고는 말했다.

"내가 그대를 때리지 않는다면, 여러 곳에서 나를 비웃을 것이다."

 

탐원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행각에서 돌아와 마조 앞에다 원 모양을 하나 그린 뒤에, 

그 위로 나아가 절을 하고는 섰다.

이에 마조가 말했다.

"너는 부처 노릇을 하고 싶은 거냐?"

"저는 눈을 비벼서 헛꽃을 만들 줄 모릅니다."

"내가 너만 못하구나."

제자는 대답이 없었다.

 

어떤 승려가 마조 앞에서 네 개의 선을 그었는데, 

위의 한 선은 길고 아래의 세 선은 짧았다. 

그리고서 말했다.

"한 선은 길고 세 선은 짧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구(四句)를 떠나고  백비(白非)을 끊고서, 

스님께서 저에게 답해 주십시오."

 

마조가 이에 땅에다 선 하나를 긋고서 말했다.

"길고 짧다고 말할 수 없다. 

그대에게 답하였다."

 

마조가 어떤 승려를 시켜 편지를 경산흠 화상에게 가져다주도록 하였는데, 

그 편지 속에는 일원상이 그려져 있었다. 

경산은 편지를 열어 그것을 보자마자

붓을 가져와 일원상 속에다 한 점을  찍었다. 

뒤에 어떤 승려가 이 이야기를 충국사에게 하였더니, 국사가 말했다.

 

"흠 스님이 오히려 마조 스님에게 속았다."

 

어떤 강승이 와서 물었다.

"선종에서는 어떤 법을 전하고 가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조가 도리어 물었다.

"좌주께선 어떤 법을 전하고 가집니까?"

"송구스럽게도 경론 이십여 권을 강할 수 있습니다."

"사자새끼로군요?"

"별 말씀을……."

 

이에 마조가 ", !" 하고 소리를 내었다. 좌주가 말했다.

"이것이 법이군요."

"이것이 무슨 법입니까?"

"사자가 굴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이에 마조가 잠잠히 있었다. 그러자 좌주가 말했다.

"이것 역시 법이군요."

"이것이 무슨 법입니까?"

"사자가 굴속에 있는 법입니다."

이에 마조가 말했다.

"나가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는 것은 무슨 법입니까?"

좌주는 대답을 못하고 있다가, 이윽고 하직 인사를 하고 문밖을 나섰다.

 

그때 마조가 불렀다.

"좌주!"

좌주가 머리를 돌리자, 마조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좌주가 말이 없자, 마조가 말했다.

"이 근기가 둔한 스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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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 염사가 물었다.

"술과 고기를 먹는 것이 옳습니까? 먹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까?"

마조가 말했다.

"만약 먹는다면 중승(中丞)이 녹()이요, 먹지 않는다면 중승의 복()입니다."

 

약산유엄 선사가 처음 석두를 찾아가서는 바로 물었다.

"삼승십이분교는 제가 대략 압니다. 

그런데 남방의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을 늘 듣고는있습니다만,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스님께서 자비로써 가르쳐 주십시오."

 

석두가 말했다.

"이렇게 해서도 안 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안 되고, 

이렇게 하고 또 이렇게 하지 않아도 모두 안 된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약산이  멍하니 있자, 석두가 말했다.

"그대의 인연은 여기에 있지 않으니, 마조 대사가 있는 곳으로 가거라."

 

약산은 석두가 시키는 대로 마조를 찾아가 공손히 절하고

석두에게 물었던 질문을 다시 꺼내자, 마조가 말했다.

"나는 어떤 때에는

그에게 눈썹을 추켜올리고 눈을 깜빡이도록 하고, 

어떤 때에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깜빡이도록 시키지 않는다. 

어떤 때에는 눈썹을 추켜올리고 눈을 깜빡이는 것이 옳고, 

어떤 때에는 눈썹을 치겨 올리고 눈을 깜빡이는 게 옳지 않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약산이 말했다.

"제가 석두에서는 마치 모기가 쇠로 만든 소 위에 앉은 것과 같았습니다."

"그대가 이미 그러하다면, 잘 지켜 가지고 있어라."

 

약산이 마조를 곁에서 모시고 지내기를 

3년이 지났는데, 하루는 마조가 물었다.

"그대는 요즈음 견처가 어떤가?"

"피부가 다 떨어져 나가고 오직 하나의 진실이 있을 뿐입니다."

"그대가 얻은 것은 마음의 본체에 합하고 사지에 두루 펼쳤다고 할 만하다. 

이미 그러하다면, 

세 갈래 대테를 가지고

아랫배를 묶고 발길 닿는 곳에 절을 세워 머물러야 한다."

 

약산이 말했다.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절을 세워 머문다고 하겠습니까?"

마조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늘 다니기만 하고 머물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고, 

늘 머물기만 하고 다니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익을 얻으려 하면 이익이 없고, 

억지로 하려고 하면 되는 일이 없다. 

마땅히 타고 향해할 배를 만들어야 하니, 이곳에 오래 머물지 말라."

약산은 이에 마조에게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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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하천연 선사가 다시 마조를 찾아왔을 때, 

아직 만나서 절도 하기 전에

곧장 승당 안으로 들어가 성승(聖僧)의 목 위에 올라앉았다. 

그때 대중들이 놀라서 곧 마조에게 알리니, 

마조가 몸소 승당으로 들어와 보고는 말했다.

 

"내 아들이 천연(天然)하구나."

단하는 곧 땅으로 내려와 절을 하고는 말했다.

"스님께서 법호를 내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천연이라 부르게 되었다.

 

담주 혜랑 선사가 처음 마조를 찾아왔을 때, 마조가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찾으러 왔는가?"

"부처의 지견을 찾으러 왔습니다."

"부처에게는 지견이 없다. 

지견이 있으면 바로 마구니일 뿐이다.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남악에서 왔습니다."

"그대는 남악에서 왔는데도 아직 조계의 심요를 알지 못하는구나. 

그대는 얼른 그곳으로 돌아가라.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된다."

 

 

담주혜랑 선사가 처음 마조를 찾아왔을 때, 마조가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찾으러 왔는가?"

"부처의 지견을 찾으러 왔습니다."

"부처에게는 지견이 없다. 

지견이 있으면 바로 마구니일 뿐이다.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남악에서 왔습니다."

"그대는 남악에서 왔는데도 아직 조계의 심요를 알지 못하는구나. 

그대는 얼른 그곳으로 돌아가라.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된다." 

 

마조가 어떤 승려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호남에서 옵니다."

"동호는 물이 가득하던가?"

"아직 가득 차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주 비가 내렸는데도 아직 가득 차지 않았더냐?"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게 '()'입니다.

본성을 안다는 것은 이미 스스로가 다하고 있는데,

알려고 하니까, 보려고 하니까, 찾으니까 순간적으로,

 

 '이것인가, 저것인가?'하는 생각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들어가 버리면

얼마나 논리로 빠집니까?

 

생각으로 들어가는 순간, 생각의 바다에 풍덩 빠집니다.

그러면 아무리 살아나려고 발버둥 쳐도

생각은 역시 비교 대상이 있거든요.

이 생각이 있으면 저 생각이 같이 있어요.

왔다 갔다 하는 게

역시 생각이거든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발버둥을 힘껏 다쳤는데, , 이게 생각이네? 하고 멈춰야 합니다.

그러면

바로 보입니다.

 

생각에 빠져서 안 보였던 것이

멈춤으로써 보입니다.

'()'도 아니고 '()도 아닙니다.

이것조차도 역시 생각입니다.

 

미소가 입에서, 눈에서, 귀에서, 모든 것에서 끊이지 않습니다.

비로소 생각이라는 굴레, 몸이라는 굴레에서

결국 자신이 만든 굴레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은 스스로가 알지 않고는 절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모든 생각이 여기서 시작되자마자 끝이 납니다. 

원래 시작과 끝은 하나입니다.

언제나 이 하나에서

모든 일은 다 일어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일에 참여하고 지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도 역시 이 일이고

죽어도 역시 이 일이지,

다른 일이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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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다양해도

어찌 이 한숨을 벗어날 수가 없구나!

이 한숨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숨을 찾지 마라.

이미 그대가 쉬고 있지 않는가?

찾기를 멈추면

 

이 한숨에서 모든 게 들어오고 모든 게 한숨에 나가니,

한번 나온 문을

찾을 수가 없구나!